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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대의 오디세이, 약전의 격물치지

210806

by 이건우

사람 댕기는 길 듣는 ‘창대’한 오디세이. 현덕에 이르는 ‘약전’의 격물치지. (자산어보, 2021)

1.
정약전은 개방적인 인물이다. 그는 서학을 믿은 죄로 흑산도에 유배를 왔지만 정작 그는 교황청의 제사금지령을 거부하고 배교의 길을 택하기도 했으며, 성리학과 서학은 적이 아니라 벗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성리학으로 서양의 기하학과 수리학을 받아들”이거나 장자와 부처를 으뜸이라 칭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창대’와 함께 서로를 벗 삼아 물고기에 대한 앎을 쌓는다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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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않는 자산(玆山)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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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을 ‘현산’으로 읽어야 한다는 학설을 들은 적이 있다. 자(玆)는 ‘검다’의 뜻을 칭할 땐 ‘현’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약전이 흑산을 자산이라고 칭하는 의도를 생각해보면 자산은 곧 ‘현산(玄山)’과 다름 아닌 것이다. 정약전이 장자를 치켜세운 것을 돌이켜 볼 때, 나는 ‘현산’에서 도가의 ‘현덕(玄德)’을 읽어내는 것이 그리 비약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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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한 덕[玄德]은 깊고도 멀어, 만물과 같이 되돌아온다. 그런 다음에야 큰 도리를 이루게 된다.”(노자 6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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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의 ‘현(玄)’ 개념은 자연에 따르는 도의 무궁무진한 존재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도의 움직임은 ‘되돌아옴[反]’이라고 했던가. 그윽하고 현묘한 덕은 무언가를 거스르고 되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달리 말하면 나와 전혀 다른 데에서 그윽하고 깊은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약전은 창대에게서, 창대는 약전에게서 스스로의 깊은 덕을 본다. 약전의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2.
창대는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에 뜻을 품은 인물이다. 창대는 약전에게 물고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고 약전은 창대에게 경서 공부를 알려준다. 그러나 약전과 뜻이 달라 사제의 연을 끊고 벼슬길에 오른다. 정약전이 아닌 정약용의 길, 즉 ‘목민’의 길을 택한 것이다. 군주도 양반도 없는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꿈꿨던 약전과 달리 창대는 백성들의 고통과 환난을 무너진 주자학의 질서를 다시 세움으로써 바로잡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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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알아야 물고기를 잡응께요. 홍어 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앙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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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슬픈 일이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소리를 내는 고둥껍질의 소리를 들으며 창대는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가슴에 품었다. 맹자는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라고 했다. 창대는 “사람의 길”을 걷고자 했던 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한 창대는 부패한 탐관오리들의 실상을 직접 목도하고 환멸을 느끼며 다시 귀향하게 된다. 고향으로 ‘되돌아온’ 창대는 약전의 죽음을 알게 되고, 그가 남긴 <자산어보>를 읽는다. 그는 약전의 죽음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3.
물고기를 알아야 물고기를 잡는다. 홍어 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 이 말을 두고 창대는 ‘사람 가는 길’을 찾고자 했으며, 약전은 물고기를 알고자 했다. 창대가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고자 했다면, 약전은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바깥 사물들의 앎을 쌓아 나갔다. 나는 창대가 ‘친민(親民)’의 길로 ‘명명덕(明明德)’에 이르고자 했으며, 약전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길로 ‘현덕(玄德)’에 이르고자 했다고 읽고 싶다. 주자의 성리학과 노자의 도가를 되는대로 버무린 것 같지만, 약전의 말마따나, 서학이든 성리학이든 노장학이든 “좋은 건 다 가져다 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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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길을 걸은 것 같은 두 사람은 결국 서로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다. 약전과 창대가 앎을 나누던 서당의 현판에 약전은 “복성재(復性齋)”라는 이름을 써넣었다.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걷기 위해 인간다움을 되찾아야 한다는 성리학이든,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닦아 깊고 그윽한 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노장학이든, 무엇으로 읽든 이곳은 약전과 창대가 서로를 벗 삼아 서로의 길을 깊어지게 해주던 검은색 무명천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약전의 죽음 이후 창대는 또 어떤 길로 ‘되돌아가’게 될까? 이 아름다운 흑백영화는 그 답을 별이 빛나는 푸른 하늘과 성게 입에서 나오는 파랑새를 통해 우리에게 넌지시 던져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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