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간이 이만큼 흘러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시간은 멈춰있지 않으니 사실 정확히 얘기한다면 아버지의 나이를 넘은 것이다. 아버지는 영원히 그 나이에 멈췄고, 나는 어떻게든 살아 이제는 따라잡았다. 삶에서 아버지와 함께 한 시절보다 함께 하지 않은 시절이 그 두 배를 넘어섰지만 언제나 사진을 보면 불과 며칠 전, 몇 달 전 같이 생생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 슬픔은 영영 가시지 않는다.
아버지는 늘 사진 찍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남아있는 사진과 필름이 꽤 많다. 그나마 나에겐 그것이 위안거리이다. 이따금씩 생각날 때면 아버지가 남긴 사진을 꺼내본다. 거기엔 아버지의 시선이 대부분이지만, 아버지가 담겨있을 때도 있다. 그때의 아버지의 모습이 불과 최근 몇 년의 나의 나이대라는 것을 느낄 때 나는 가슴이 미어지기도 하고, 아버지는 그 나이대에 어떤 생각으로 살았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 그런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늘 존경의 대상이었고, 항상 찰떡같이 붙어 다녔지만, 나는 아버지의 친구가 되기엔 너무 어렸다. 이제는 아버지와 친구처럼 마음을 나누고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20대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떠났고 나는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아버지의 빈자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고, 결코 대체될 수도 없다. 오히려 아버지의 나이가 되니 그 빈자리가 더욱더 크게 느껴지고, 내가 이 나이대에 경험했고, 경험해 가는 걸 아버지는 하지 못했음을 하나하나 느낄 때마다 한없이 마음이 무너질 뿐이다. 나는 영영 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으니, 이런 마음을 물려줄 일은 없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그 누구도 나처럼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는 노인이 되지 않는다. 늘 젊은 모습뿐이다. 나는 아버지 나이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아버지보다 더 늙어갈 것이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아버지보다 자식이 더 늙어 있는 모습이 되겠지. 영화와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아버지가 나를 보러 오지 못할 것이란 점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의 나이를 따라잡기 힘든 삶은 어떤 것일까. 아버지와 함께 술잔을 맞닿을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아버지와 인생의 진로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인터넷을 하고 스마트폰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사진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아버지가 디지털카메라를 쓰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영원히 경험해 볼 수 없다.
그저, 코 찔찔 꼬맹이가 어느덧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그 세월을 넘어선 삶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얼마가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소진해 가면서 덤덤히 살아갈 뿐이다.
2023.05.08. 어버이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