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 고민정
매달 한번씩 모이는 시각예술그룹 '이삼공피'에서 올해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작년까지는 전시나 영화를 본 뒤, 그것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진행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마치 롤링페이퍼처럼 여섯명이 각자 가져온 종이를 돌려가며, 자신이 느낀 것들을 그림으로 담고 리뷰도 적어서 이것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2월 정기 모임에서 함께 본 작품이지만 코로나와 다른 프로젝트 진행으로 인해 조금 늦춰져 늦게나마 리뷰를 올려봅니다.
2월 주제 선정자로서 전시나 영화를 찾던 중, 이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제목과 그림 의뢰를 받으며 시작되는 줄거리가 마음에 끌렸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도 초상화가 주인공들에게 중요한 매개체인 만큼 감독이 마치 그림 같은 장면과 구도들을 영화 속에 담으려고 하는 노력이 보여 영화를 보는 내내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화가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어머니에게 초상화를 의뢰받게 된다. 대신 모델인 엘로이즈 모르게 완성시켜야 한다는 미션을 받는다.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마리안느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엘로이즈에게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숨기고 다가갔다. 자신의 실력으로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었지만 서로의 진실, 감정을 숨긴 채 그려진 초상화는 어딘가 어색한 모습을 띈다.
평소 사람을 많이 그리지 않아 초상화에 대한 경험이 적지만 특정한 누군가를 닮게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닮게 그린다는 것에는 외형으로 판단되지만 정말 극사실주의가 아닌 이상, 그림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도 한몫한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대상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호주에서 10일 동안 친구의 집에 묶었을 때, 친구의 고양이와 함께 했는데 한국에 와서 그 고양이를 그려 선물해 주고 싶었다. 찍어온 사진을 보고서 그려보았지만 아무리 수정해도 어딘가 모르게 닮지 않아 아직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고 있다. 평소 동물들을 그릴 때는 어떤 특정한 동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처음 시도해본 친구의 고양이 작업에서 막혀버렸다. 좀만 더 그 집에 머물며 그 아이와 친해지고 교감하며 관찰을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런 나의 경험을 대입하며 영화를 감상하니 더욱 스토리에 빠져들게 되었고 주인공들의 사랑이 나의 사랑과는 다른 종류이지만 어떤 감정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해가 가고 공감이 되었다. 이를 보며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과의 공통된 경험의 교류가 사람 사이에서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글 | 고민정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아름다운 미장센, 여성주의 영화로서의 탁월함, 애틋한 로맨스 등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려 한다. 영화는 화가와 모델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 보여주고 있다. 엘로이즈는 남성 화가가 그리는 결혼을 위한 초상화 모델이 되길 거부한다. 그리고 마리안느에 의해 몰래 그려진 첫 번째 그림을 혹평을 한다. 마리안느가 다시 그리기로 했을 때, 엘로이즈는 스스로 모델이 되면서 마리안느에게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 날 바라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시선은 곧 권력이다. 화가는 항상 뮤즈를 바라보는 자이고 모델은 바라봐지는 자로서 대상화된다. 엘로이즈는 바라봐지는 자(모델)로서의 수동적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의 선언을 한 셈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시선을 평등하게 나누고 교감할 때,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완성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는 모델과 화가의 관계 그리고 시선에 대한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영화이다. 또한 영화 전체는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관객으로서 그 시선을 마주했을 때 나는 동질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나에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여성이 착취당하지 않는 영화, 관람 후 불편함이 없는 영화, 그리고 나의 시선이 함께 할 수 있는 영화이다.
글 | 리진
연기도, 색감도, 음악도 좋은 영화였다. 그러나 그런 예술적인 형식들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영화는 거의 여성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소피. 셋만이 남은 집에서 그녀들의 관계는 갑자기 동등해지고 급속도로 친밀해진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몸을 움직여 소피의 낙태를 돕고, 셋은 함께 카드 게임을 하고 심지어 소피가 수를 놓는 동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식사를 준비하기도 한다.
영화는 그렇게 여성들 간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축제의 밤, 모닥불 근처에서 주문 같은 노래를 외우며 춤을 추는 여성들의 모습은, 흔히 묘사되는 마녀의 축제를 닮았다. 그것은 여성들이 마녀로 치부되어 온 역사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박해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이어져온 여성들 간의 오래된 연대를 보여준다. 소피가 낙태를 위해 찾아간 집에서 나이 든 조산사는 그녀를 도와준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시선을 피하는 마리안느에게 이 장면을 보라고 주문한다. 그날 밤, 셋은 힘을 합쳐 그 장면을 그림으로 남긴다. 남성 중심의 신화와 역사적 사건이 가장 가치 있는 그림의 소재로 평가받던 시대, 그녀들은 서로 모여 여성들에 의한 낙태의 장면을 그린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이러한 여성들의 세계와 연대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그녀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가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마지막 밤에도 그녀들은 서로를 마주하고 바라본다. 엘로이즈도 결혼을 거부하지 않지만, 마리안느도 그녀에게 결혼을 파투 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마주 보았기에 서로 그럴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가 원치 않는 선택이라는 것 역시 안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나를 비난하지는 말라고 화를 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 엘로이즈 역시 주체로 존재하는 한 그녀의 고통은 사라질 수 없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본인의 사랑에 취해, 자신을 사랑 대신 다른 것을 택해 떠나버린 나쁜 년으로 대상화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둘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서사가 아니라, 둘이 사랑하고 둘이 이별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녀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서로를 마주 본 채 작별을 하고 있다. 오르페우스 혼자 뒤를 돌아본 것이 아니라, 에우리디케가 뒤를 돌아보라고 말한다. 신부의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가 떠나는 마리안느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말하듯이.
글 | 김한별
영화에는 스펙터클한 내러티브도, 화려한 장면도 없었고 음악은 절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도 졸지 않았다. 졸지 않은 나를 칭찬하고 싶지만, 영화 자체가 끝까지 집중하면서 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초상화가 마리안느가 바다에 빠진 그림도구를 건지기 위해 입수하는 영화 초반부의 장면이 의구심을 자아냈다. 영화의 제목은 (불) 타오르는 초상인데, 왜 초반부터 물을 뒤집어쓸까? 물은 불과 대치된다. 섬을 둘러싼 바다, 해변가의 파도, 비발디의 사계 여름 3악장의 폭풍우는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정략결혼, 신분제, 성차별,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제한이 당연한 18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은 이런 관습과 계급, 차별을 나타낸다.
흠뻑 젖은 캔버스는 사회적 요구에 맞춰 뮤즈인 엘로이즈를 대상화시켜 그려내려는 마리안느를 상징하는 듯하다. 첫 그림은 지워져 나가고 둘 사이에 전환을 맞이한다. 심야에 벌어진 축제에서 엘로이즈의 치마로 옮겨진 모닥불, 벽난로의 장작불, 어두운 방안에 켜놓은 촛불은 물을 증발시킨다. 물기는 마르고 불은 번져 나간다. 불은 개인의 주체성을 밝혀주고, 둘의 관계를 들여다보며 깊어지게 하고, 하녀 소피와의 관계도 평등하게 한다. 마리안느, 엘로이즈, 소피는 하나에서 둘, 그리고 셋으로 연대되어 계급을 넘어선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물 위에서 타오르는 불은 진화될 수밖에 없다. 격정적인 둘의 사랑이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함을 알려 준다. 그러나 ‘둘은 행복했습니다.’라는 판타지적 결말이 아니라서 영화는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관계의 끝을 인정하며 서로를 탓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가지며 살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간직하고 정해진 삶을 살아간다.
글 | 박미화
나에게 이 영화는 사운드로 기억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대신에 여러 소리들이 확대되어 들린다. 숨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 종이에 손이 닿는 소리, 그림을 그릴 때 콘테가 그어지는 소리, 장작 타는 소리, 파도 소리. 이런 생활의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서인지, 고립된 섬 안의 여성들이 느꼈을 그 시대의 적막이 생생히 다가온다. 시각뿐 아니라 청각으로 전달되는 감정들이 많다. 영화 내내 들려오는 거친 파도 소리는 자유에 대한 갈망인 동시에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으로도 느껴진다.
영화에서 음악은 총 세 번 쓰였다. 고요한 공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음악은 이질적이고 낯선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더욱 강력하다. 첫 번째 음악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비발디의 <사계>를 기억에 의존해서 들려주는 장면에서 쓰인다. 악보가 없어서 기본 화성만 쳐보며 곡에 대해 설명할 때이다. 음악을 통해 이 둘은 서로의 역사를 조금씩 공유하고 친해지는 과정을 갖는다. 이렇게 한 번 쓰인 음악은 마지막 장면에 다시 한번 쓰이는데 그때는 기억이 덧입혀지며 완전히 다른 방식의 음악이 된다.
두 번째 쓰인 음악은 더 인상적이다. 어느 날 밤 축제에서, 타오르는 불 근처로 하나둘 모여든 여성들이 화음을 쌓아가며 노래를 시작한다. 처음엔 그저 노이즈와 같은 불협화음처럼 들려 마치 현대음악 같기도 하다. 어떤 악기도 쓰이지 않은 채 여성들의 목소리와 박수로만 이루어진 이 음악은 어느 순간 화음을 이루어 감정을 고조시킨다. 라틴어 노랫말은 가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주문처럼 들린다. 주술적인 느낌마저 드는 이 기이한 분위기 속에서,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갑작스럽게 돌출된 음악 안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떠했을지 자연스럽게 이입되는 순간이다.
세 번째 음악은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는 비발디의 <사계>를 엘로이즈가 관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온다. 첫 번째와 같은 음악이지만, 제대로 된 연주로 크게 듣는 이 곡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쌓아놓은 서사 때문에, 커다란 감정의 파장이 되어 돌아온다. 두 사람 사이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크게 몰아쳤는지,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 음악이 말해준다. 카메라는 곡을 연주하는 쪽이 아니라 오직 엘로이즈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해서 보여 준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관객들은 상상하게 된다. 그녀는 숨을 가쁘게 쉬며 기억 안에서 마구 달리는 것 같다. 슬픔과 환희, 고통과 즐거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얼굴. 폭발적인 음악의 소용돌이 안에서 우리는 통째로 이 영화를 되돌아보며 그녀와 함께 감정을 느낀다.
단 세 번, 절제하며 쓰인 음악이지만 중요한 감정의 변곡점에서 터지듯 나오는 음악이기에 강렬하게 기억된다.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영화이지만, 귀를 열고 청각에도 집중한다면 더 풍부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글 | 안재원
나는 평소에 웬만큼 지루한 영화라도 어떤 포인트만 있다면, 감정이입을 잘 하는 편이다.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기도 하고, 우연히 본 영화에 함께 감정이 요동치며 급격한 우울감이나 행복감에 혼자 빠지기도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호평을 받은 이 영화는, 나에게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금단의 사랑으로 그녀들이 빠져드는 과정에서도, 아픈 이별 이후의 그리움에서도, 우연한 재회의 장면에서도. 빠져들고자 마음을 한껏 열고 집중해 보았지만, 어떠한 작은 포인트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쉽게도... 거의 감흥이 없었던, 시들어간 여인들의 초상.
글 | 김희진
드로잉 과정이 궁금하신 분들은 https://www.instagram.com/230p_/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