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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모리 Dec 15. 2022

지겹고 지루한 장거리 연애를 마치며

토마토-토론토에서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사소한 것을 집착했다. 중학생 때 쓰던 자주색 샤프는 흔한 보급품이었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하나의 루틴처럼, 행운의 아이템처럼 지고 다녔다. 또 이런 것들. 하이테크 볼펜은 2,500원인데, 파인테크 볼펜은 700원이었다. 하나하나 다른 색이 예뻤다. 문방구마다 색 라인업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고 일부러 먼 곳까지 가서 귤색같은 레어한 컬러를 모았다. 어느덧 파인테크 볼펜으로 필통 하나가 꽉 찼다. 이건 나의 전리품이었다.


청소시간에 자주색 샤프를 잃어버리고, 음악실에 두고 온 파인테크 볼펜 필통은 누가 훔쳐갔다. 모든 것이 과잉이었던 15살은, 너무 사랑하면 상처받는다고 선언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만 사랑하고 이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부터 생각나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 순간부터 나는 금방 사랑에 빠졌다. 장점은 쉽게 알아차리면서 단점은 생각하지 않았다. 사소한 호의에 설레며 재고 따지는 것 없이 좋은 걸 좋다고 말했다.


남들이 다 말린 첫 연애도,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연애를 하겠다고 만난 대학 선배도. 20살 초반의 나는 사랑밖에 몰랐다. 모든 감각은 상대에게 쏠려있었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나는 다 맞출 수 있어. 전심전력이 상대방을 질리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상대방이 한 발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별은 난데없었고 무너진 일상을 어떻게 수습할지 막막했다.


"우리는 언젠간 헤어질 거야. 당장 내가 내일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언젠간 죽기 마련이잖아. 언제든 이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서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어"


언제일지도 모르는 이별은 생각도 하기 싫다며, 끝나가는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고만 했다. 울며 만나서 얘기해 보자는 말에 전화기 너머로 그는 말했다. 너랑 지금 헤어져도 나는 하던 신발 쇼핑 계속할 거야. 커플링은 결혼할 사람과 할 거라고 말한 그는, 이별 뒤 커플링을 끼고 나타났다. 여전히 과잉이었던 21살은 우스운 게 뭔지도 몰랐다.


반드시 이별하고, 내 삶이 우선이다.

꾸역꾸역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붙잡고 오열하고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감정을 토해내고 싶지 않았다. 전심전력을 경계하니 꽤 심플했다. 난 너에게 집착할 어떤 권리도 없고, 너의 사생활을 존중할 거야. 훤은 이런 내게 꼭 맞는 사람이었다. 나는 갑자기 물어봤다. 어떤 사람은 캐나다로 가는 내가 이기적이래, 너도 그렇게 생각해? 모든 사람은 이기적이야. 내가 회사에서 야근하는 것도, 네가 캐나다를 가는 것도, 모두 본인을 위한 선택인데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어. 너의 선택을 존중해.


장거리 연애는 물리적인 거리를 극복할 만큼 진득한 연락과 공유가 필요한데, 캐나다와 한국 사이에는 14시간의 시차가 있다. 내가 느지막이 눈을 뜰 때쯤 그가 잠들고, 그가 일어날 때 나는 저녁을 즐겼다. 서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아, 그는 더 이상 내가 궁금하지 않구나 생각이 들 때쯤은 이미 형식적인 안부만 오가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상대가 느끼지 않을 리 없다. 캐나다에 온 내 선택을 존중해줬듯, 나도 네 선택을 존중해. 나에게 얽매일 필요 없어. 장거리 연애는 으레 그러하듯 흔한 수순을 밟았다.


어딘가 뒤틀린 사람과, 언제든 이별할 수 있는 사람과, 자기 삶을 침범받고 싶지 않은 사람과,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 이 모든 이별이 지겹고 지루하니 전심전력이 조금 그리워졌다. 시간이 갈수록 무감해지는 것도. 무감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상처받은 사람들만 남아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힘을 빼는 것도. 시간과 감정 낭비를 경계하는 것도. 지겹고 지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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