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 한우산 백패킹
멀리 갔다. 경상남도 의령 한우산.
'韓牛'가 아니라 '寒雨'산이다.
정상까지는 보통 주차장에서 10분 정도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잘 되어 있는데, 요즘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인파 분산을 목적으로 차량은 쇠목재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차로 쇠목재까지 가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었는데, 사진처럼 구불구불한 엄청난 경사의 산길을 따라 올라가며 순식간에 해발 700여미터까지 도달하였던 것이다.
쇠목재부터 한우산 정상까지는 또 2km 정도 걸어야만 했는데, 우리가 그것이 되레 잘 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올라가는 길에서 나오는 땀방울과, 상쾌하게 들리는 새소리, 올해도 돌아온 파아란 신록과 맑은 하늘의 조합이 썩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로 인해 한우산 정상에서 전세캠을 맛보는 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쇠목재에서 올라가는 길 중간에는 주위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방금 차로 올라온 길이다. '색소폰 도로'라 이름붙여져서 많은 사진 동호인들이 출사를 나오는 곳이라는데, 내 눈에는 업힐을 즐기는 자전거 라이더들에게 엄청나게 사랑받을 수 있는 곳이리라 보였다. 한우산 도로 초입부터 쇠목재를 지나 정상까지 대략 6km 정도의 업힐 구간이 재밌게 펼쳐져 있다.
맞은 편에 보이는 산은 한우산과 연결된 자굴산으로, 이 곳에서는 데크가 여러 군데 마련되어 있어 백패킹을 즐기시는 분들이 한우산 뿐 아니라 자굴산에도 많이들 가신다고 한다. 여기도 역시 정상 즈음까지 찻길이 잘 뚫려 있다.
오후 네 시쯤 도착한 한우산 정상 박지엔 이미 다른 백패커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세캠의 상상은 바로 깨지고 말았다. 언제나 느끼지만 백패커들은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천천히 움직이지만 멀리 가고, 힘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즐긴다. 존경스럽다.
해넘이를 조망할 수 있는 빈 자리에 텐트를 먼저 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우리의 노오란 텐트는 늘 팽팽하게 당겨 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의자에 앉아 침묵하며 쉬며 신발을 말리고 땀도 말리고 그렇게 정상의 시간은 조용히 흘러간다.
백패킹을 오면 다른 아웃도어보다 유독 말수가 적어지는데, 그것은 다른 백패커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침묵의 시간을 즐기기 위한 것이 크다.
말 없이 가볍게 손을 잡고 흘러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뺨으로 느끼며 장애물 없이 뇌리쬐는 오후의 태양빛을 눈을 살짝 감고 맞는 이 시간은 매우 천천히 흐르지만 아주 감미로워 두근거린다.
잠시 쉰 후에는 무거운 배낭은 내려두고 산정 어귀를 산책하기로 한다. 5월 초입의 한우산은 철쭉으로 뒤덮히기 시작했다. 철쭉과 진달래는 무척 닮아서 구분하기 어려운데, 위와 같이 푸른 잎과 꽃이 같이 피어 분홍과 초록이 조화로움이 보이는 것이 철쭉이고, 잎 없이 꽃만 먼저 나는 게 진달래다.
우리는 이 자연이 주는 빛과 색이 일상적이지만 큰 기적임을 되새기며 해질 무렵까지 철쭉 밭 속에서 조용히, 천천히, 부드럽게 산책을 한다.
태양이 넘어가며 박지에도 어스름이 내려온다. 백패커들이 텐트마다 불을 하나씩 켜기 시작하고 곧 텐트 풍경은 장관이 된다.
이 텐트들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각자의 빛과 색을 가진 7성급 호텔이 되어 산 정상을 빛낸다.
춥지 않은 5월 초의 새벽 따뜻한 바람이 우리를 깨웠다. 한우산의 운해는 갓 머리를 드는 태양을 보랏빛으로 반사하며 물들었다.
운해의 끝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따스하게 데워지는 새벽의 한우산 정상에서 한참 동안이나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산이 좋은 이유, 새벽이 좋은 이유, 네가 좋은 이유, 이렇게 다시 돌아온 미라클모닝.
산에서의 백패킹은 이른 아침에 종료된다. 부지런하게 아침을 맞고 텐트를 잠시 말리고 먼지를 턴 후에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산을 놔두고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