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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M Sep 10. 2024

'에이리언'과 '감정의 문제'

명연설이 실종됐다. 이삼십여 년전까지만 해도 유력 정치인들은 말그대로 광장(廣場)의 인파(人波)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쩌렁쩌렁 피력했다. 진영에 따라 생각은 다를지언정, 자신의 논리를 펴면서도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명연설들이 군중의 가슴에 불을 지를 때가 있었다. 


지금은 유력 정치인들도 중요한 이슈에서 조차 소셜미디어에 글 한 줄 띄우고 댓글창 들락거리며 간이나 보고 있는 느낌이다. 국경일에 나오는 수반(首班)의 기념사도 연설문으로서의 고아함은 차치하고 논리와 철학은 충분한가 묻게 된다.


작금의 대중 연설에 남은 거라고는 “아닙니까? 여러부-운!”하는 지겨운 클리셰뿐이다. 창의성도 없지, 그건 또 왜들 그렇게 따라하는지. 


   인류의 유서깊은 유산 중에 대중을 설득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학문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싹텄던 수사학(rhetoric)이다. ‘수사학의 아버지’라 불릴만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말로 신뢰를 주는 방법적 요소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뭔가를 증명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로고스’(logos)와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과 관련이 있는 ‘파토스’(pathos)가 그 중 두 가지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논리와 감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파토스는 청중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감정이란 분노, 연민, 두려움이나 그 반대의 감정처럼, 사람들이 판단을 바꾸게 되는 모든 느낌을 말한다. 18세기의 수사학자 조지 캠벨도 “열정을 움직이는 것이 불공평한 설득 방법이기는커녕 열정을 움직이지 않으면 설득도 없다”라고 하였다.


다.양.한. 감정은 인간 고유의 특질이다.

  

"에이리언:로물루스" 포스터 中 / 디즈니

개봉 이후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2024년 여름 시장의 승자로 기록된 “에이리언:로물루스”는 에이리언 프랜차이즈의 일곱 번째 영화다. 명장 리들리 스콧이 탄생시킨 이 스페이스 호러는 우주 산업과 생명 공학이 발달한 미래가 배경인데, 인간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 로봇인 안드로이드가 사건 진행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를 보는데 귀에 꽂히는 대사가 있었다. 인간을 착취하는 초거대 기업인 웨이랜드 유타니사가 만든 안드로이드 과학 장교 ‘룩’의 대사다. 


‘에이리언’ 1편의 과학 장교 로봇과 같은 기종인 룩은 제노모프(에이리언)가 날뛰는 사고로 하반신이 뜯겨나가는 바람에 기능이 정지된 상태로 르네상스 우주정거장에서 발견된다. 독립행성 이바가로 탈출하기 위해 우주정거장에 갔다가 에이리언들과 마주쳐 사투를 벌이던 우리의 주인공들, ‘페이스허거’(에이리언 유충을 사람 몸에 심는 생물체)가 조종사를 덮치자 반신불수 상태인 룩을 재가동시켜 해결책을 구하려고 한다. 


주인공들이 어찌어찌하여 조종사 얼굴에서 페이스허거를 겨우 떼어냈지만, 룩은 페이스허거가 조종사에게 이미 에이리언 유충을 심었을 확률이 60%라면서 인간우호적인 안드로이드 앤디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무리 합리적이려고 노력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수많은 감정들을 거치는 습성이 있지. 너는 인간들이 최선의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야해”


룩의 임무는, 다시 말해 룩에게 프로그램된 알고리즘은, 생명 공학의 결정체인 Z-01이라는 검은 액체 물질을 유타니사로 보내는 것이 최우선으로 한다. 괜히 인간 조종사를 봐주다간 임무 수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그렇다. 룩의 말처럼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우리는 이성적 결론에 다다르기 전에 쓸데없이(?) 감정이라는 필터를 거친다. 심지어 감정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이성을 이용하기도 한다.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가정하는 주류경제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경제적 행위를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행동경제학이 나온 이유다.


A.I.는 감정이 없다. 동물을 비롯한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도 감정이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지만, 인간이 평생 쌓아올리는 ‘감정의 골’은 이들과 다른 독특한 등고선을 갖는 것 같다. 사람은, 머리로는 안된다고 해도 가슴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시킨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적 선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로고스가 있는데도 파토스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신은 왜 인간에게 이성뿐 아니라 감정도 함께 주었을까? 감정은 어떤 생화학적 기능의 발로일까. 아니, 감정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혼의 작용일까? 


인간을 숙주삼아 오로지 DNA의 전파를 위해 직진하는, 몸서리치게 본능에 충실한 에이리언들을 보면서 논리와 이성만으로써 설명되지 않는 ‘세계의 목적성’에 대해 떠올려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수사학의 3대 요소 가운데 마지막 하나는 바로 ‘에토스’(ethos)이다. 에토스는 화자의 성품과 관련이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를 파토스와 로고스보다 앞에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세, 음성, 단어의 선택, 성실성 같은 “‘화자의 성품’은 청중에게 신뢰를 주는 데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면서 “연설가는 자신의 연설이 뭔가를 입증하기에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만 신경써서는 안 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보여주고 연설을 듣는 자들의 판단에 영향을 주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의 연설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바로 연설자의 에토스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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