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 문명은 석유 문명이다. 현대인의 일상은 석유 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하지 못한다. 이 검은 액체가 인간의 탐욕을 어떻게 부추기는지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원제: Killers of The Flower Moon)에 잘 나타나 있다.
석유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는 석탄의 시대였다. 석탄을 주연료로 삼은 증기 기관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증기 기관을 혁신적으로 개량한 인물은 영국 50파운드 지폐의 주인공이었던 제임스 와트.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제임스 와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근대적인 시간의 발명자였다” (산업혁명은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자던’ 인류의 시간 개념을 기계적인 시간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임스 와트는 스코틀랜드인이다. 예로부터 스코틀랜드 땅에는 석탄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석탄보다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명물이 있으니 바로 위스키다. 스카치 위스키는 위스키의 대명사다. 본디, 스코틀랜드에서 보리를 사용해서 만든 술만을 위스키라 불렀다.
2
패션도 유행을 타지만 술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와인이 유행이더니 이삼년 전부터는 위스키가 유행했고 요즘엔 위스키 베이스의 하이볼이 유행인 듯 하다.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도 퇴근길에 매일 한잔씩 걸치는 하이볼은 일본에서 맥주 다음으로 대중적인 술이다.
일본은 위스키 강국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다케쓰루 마사타카와 산토리 창업주인 도리이 신지로가 야마자키 증류소를 건설한 게 1923년, 백 여년 전 일이다.
얼마 전 개봉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코마다 위스키 패밀리”는 ‘위스키 제조’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뤄 눈길을 끌었다. 소재만 봐도 저패니메이션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는 걸 알 수 있다. 위스키 장인이자 경영자였던 아버지의 타계 이후, 위기에 처한 코마다 증류소를 이어 받은 딸 루이가 최상급 위스키 ‘코마’를 부활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히비키'(響)나 '야마자키'(山崎)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는 일본 위스키 브랜드들의 탄생기를 막연히 연상시킨다.
지난해 안시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인 이 영화가 그리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시간의 술’인 위스키가 어떤 과정을 통해 -특히 전통과 아날로그, ‘스피릿’ 측면에서- 만들어지는지 엿볼 수 있다.
3
석탄은 탄소함유량에 따라 분류된다. 이탄-아탄-갈탄-역청탄-무연탄이 그것이다. 이 중 탄소함류량이 60% 미만인 석탄을 ‘이탄’[泥炭, 피트(peat)]이라고 부른다. 이탄은 이끼나 풀, 나무 뿌리 같은 식물질이 습지 등 지표면에서 퇴적 및 분해 작용을 받아 생성된, 완전히 탄화되지 못한 상태의 석탄이다. 한마디로 되다 만 석탄이다.
중세에는 땔감이 없으면 이탄을 말려 난방용으로 썼다고 하는데, 탄소함류량이 낮아 화력이 약하기 때문에 다른 석탄에 비해 산업적 연료로서 쓰임새는 별로다. 그런데 이탄이 여전히 요긴하게 쓰이는 데가 있다. 바로 스카치 위스키를 만들 때이다.
병원 소독약 냄새, 모닥불 냄새, 짭쪼름한 바다 내음…
스코틀랜드산 ‘피트(peat) 위스키’의 맛과 향을 묘사할 때 쓰는 표현이다. 특히 ‘위스키의 성지’로 불리는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의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라가불린, 라프로익, 아드벡 같은 피트 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증류소들에서는 섬에 널린 이탄을 떼어 건조한 뒤 이를 태워서 위스키의 원료인 발아된 보리, 즉 맥아[麥芽, 몰트(malt)]에 훈연향을 입힌다. 이 과정에서 피트 위스키 특유의 스모키한 독특한 풍미가 만들어진다. (물론 피트향도 고수처럼 죽고 못사는 사람과 죽어도 못 먹는 사람으로 나뉜다)
이탄은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전통과 제조 방식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스카치 위스키의 정체성과 문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코마다 위스키 패밀리”의 상속녀 루이가 만들려는 최상급 위스키 코마가 가문의 유산을 상징하듯이.
4
지난 1일, 영국이 G7 국가 중 처음으로 석탄화력발전을 멈췄다. 로빈 후드로 유명한 노팅엄 외곽에 위치한 영국의 마지막 석탄화력발전소인 랫클리프 온 소어 발전소가 ‘10억 잔 이상의 홍차를 끓여 마실 수 있는 에너지’를 매일 생산하다 가동을 끝낸 것이다. 1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한 이래 142년 만의 일이다.
영국은 한때 전세계 석탄 생산량의 85%를 차지하며 17~19세기 세계 최대의 석탄 생산국이었다. 석탄 발전은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전기 공급량의 80%를 담당했고, 2012년까지도 40%에 육박하는 발전량을 책임졌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1%로 급전직하했고, 그 빈 자리를 가스(35%), 풍력·태양광(33%), 원자력(14%), 바이오에너지(12%) 등이 대신했다.
OECD 국가들에서 석탄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36%에서 지난해 17%로 떨어졌다. 하지만 전세계 전기 생산량의 1/3은 아직도 석탄에 의존한다. 한국도 석탄화력발전 비중이 39% (2022년)가 넘는데 심지어 올해 새로운 석탄화력발전소인 삼척블루파워가 완공되기도 했다.
5
석탄은 고생대 석탄기(3억6천만년 전~2억9천만년 전)에 주로 형성됐다. 나중에 석탄이 되는 고사리류도 그 무렵 지구상에 출현했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 것은 고작 30만 년 전이다.
지구 46억 년 역사를 하루 24시간에 비유하면 석탄과 고사리는 오후 9시40분쯤 지구상에 나타났고, 인류는 오후 11시59분55초에 출현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석탄을 ‘문명의 땔감’으로 이용한 200년도 안되는 시간은 글자 그대로 '순간'(瞬間)에 가깝다. 그 찰나와도 같은 시간에 인간은 지구의 많은 것을 망쳐 놓았다. 유례없이 뜨거웠던 2024년의 여름이 그 대가라고 우리는 짐작한다.
영국에서 석탄 발전의 시대는 막을 내렸어도 피트 위스키는 계속 생산될 것이다. 뭐든지 대량·과잉 생산과 소비, 인간의 탐욕이 문제이지, 스코틀랜드의 크래프트 위스키 증류소에서 태우는 소량의 이탄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석탄화력발전은 가도 이탄은 위스키로 남는다. 오크통에서 시간이 압축된 술 위스키는 세월을 맛보는 술이다. 빨리 만들 수가 없다. 찰나를 사는 인간이 수억 년 전 형성된 이탄의 향취를 맛보는 것이다. 위스키를 홀짝이며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한다. 고사리가 지구상에 존재한 시간의 반의반의반의반의반의반의 반도 못 산 인간들이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행세하며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산다. 백세를 살아도 찰나요 순간일 뿐인데, 하물며 오년의 권력은 말해 무엇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