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든든하니 풍광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야 고차원적인 욕구를 채울 수 있다는 매슬로우(A.H.Maslow)의 욕구단계이론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이제 본격적으로 눈 구경을 할 차례다.
그야말로 눈 천지다. 가장 신난 건 아이들이다. 눈을 뭉쳐서 던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눈사람 만들기도 필수다.
사실 나도 신났다. 군대 이후로 이렇게 많은 눈을 보긴 처음이다. 2010년 초쯤엔가 역대급 폭설이 내려 눈이 허벅지까지 쌓였던 적이 있다. 하지만 감상은 반대다. 시라카와고에서의 눈이 환희라면, 군대에서의 눈은 분노다.
전통가옥 내부를 구경해 볼 수도 있다. 실제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고 관광을 위해 박물관처럼 개방해 놓은 곳이다. 집 주변을 지날 땐 조심해야 한다. 지붕이 가파르다 보니 무겁게 쌓인 눈이 흘러내려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념품 상점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갓쇼즈쿠리 지붕이 시라카와고의 상징인 만큼 집 미니어처 상품이 주를 이룬다. 우리도 서재 장식용으로 조그마한 집을 하나 구입했다.
간식 가게도 다양하다. 붕어빵 마냥 소고기(히다규) 스시를 파는 노점도 있다. 우리는 점심에 히다규를 먹은 데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 지나쳤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도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섰다.눈 천지에서 먹는 아이스크림 맛은 어떨지 뒤늦게 궁금해지네.
콩과자 가게를 발견했다. 검색해 보니 상호가'두요시(豆吉, mame-kichi)'인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의 여주인공 이름이 아오마메(푸른 콩)였던 것이 떠오른다.
두요시는 시라카와고에만 있는 가게는 아니고 프랜차이즈로 보인다. 대표적인 상품이 사진에 나오는 속에 콩이 들어있는 둥근 공 형태의 과자다. 한 봉지에 530엔. 와이프가 먹어보더니 "오징어땅콩이네" 한다. 맛이나 식감은 다르지만 구조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맛은 블루베리, 딸기, 망고, 사과, 사케 등등 각양각색이다. (오징어 맛은 없다.) 경험 삼아 블루베리맛을 사보았는데 너무 맛있었다. 아삭한 겉과자의 식감, 이후 지구의 내핵처럼 숨어있던 콩이 오도독 씹힌다. 블루베리의 새콤달콤한 맛과 콩의 고소함이 생각보다 잘 어우러진다. 뒷맛으론 콩 보단 블루베리 향이 강하게 남는다.
너무 마음에 들어 선물용으로 몇 봉지 더 사기로 했다. 가게에 다시 들어가 "혼또니 오이시"라고 직원에게 감탄사를 보냈다. 인기 있는 맛은 1위가 애플빈, 2위가 사케(정종)라고 한다. 시라카와고 여행 도중 입이 심심하다면 한두 봉지 사 먹어보길 추천한다.
흰 눈밭에서 진을 빼고 있노라면 아마 진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질 것이다. 그런데 시라카와고엔 카페가 많지 않다. 우리나라 관광지였다면 아마 한 집 건너 카페를 차렸을 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혈관에 카페인이 흐르는 사람이라 수혈이 필요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쿄슈'라고 부르는 카페다. 좌석은 테이블 없이 전부 다다미로 돼있다. 카페 한쪽에 큼지막한 통창을 내서,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배치했다.
우리는 김이 모락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시라카와고의 청명한 하늘과 눈을 구경했다. 지붕 밑엔 고드름이 투명하게 맺혀 있었다. 심장 박동이 아다지오(Adagio)로 느려진다.
이렇게 맑은 날씨를 즐겨본 적이 언제던가? 언젠가부터 한국의 하늘은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미세먼지가 사계절 기승을 부리는 탓이다.
이 정도 뷰에 주변에 경쟁 카페가 없는데도 커피값은 한 잔에 5000원 안팎으로 꽤나 합리적이다. 잔잔한 에세이집 한 권 여유롭게 읽으면 더욱 좋겠다 싶은 곳이다.
시라카와고의 핵심은 전망대(ogimachi)다. 인터넷에서 시라카와고를 검색하면 나오는 마을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유료 셔틀버스(1인당 200엔. 하차 시 기사에게 현금 지불)를 타고 오갈 수 있다. 셔틀버스 정류장 위치는 구글맵에서 'Bus to Obsevatory'라고 검색해서 찾아보자. 이로리 식당 근처다. 셔틀버스는 오전 9시부터 2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데 오후 12시부터 1시까지 차편은 운행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어서 그런 듯하다. 셔틀버스가 크지 않은 만큼 줄을 늦게 서면 탑승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전망대까지 걸어갈 것도 가능하다. 편도 10분 거리다. 다만 오르막길인 만큼 쉽지는 않다. 그래서 올라갈 땐 셔틀버스를 이용해 편히 가고, 내려오는 길을 걸어오는 것이 낫다. 내려오면서 시라카와고의 전망을 계속 즐길 수도 있다.
전망대에선 이렇게 시라카와고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집집마다 눈이 쌓여있는 모습이 동화 속 마을 같다. 친구 중 한 명은 가을에 왔다는데 단풍이 아주 예뻤다고 한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고 여름엔 녹음이 우거지리라. 사계절을 모두 보고 싶은 여행지는 흔치 않다.
이정도면 시라카와고를 충분히 둘러본 것 같다. 눈 위를 걸어다니는 것도 꽤나 체력을 요하는 일이다. 이제는 미리 예약해둔 료칸 '온야도 유이노쇼'로 이동해 노천탕에 몸을 녹일 차례다.
3편에서 계속
시라카와고 복장 Tip
시라카와고를 안전하고 쾌적하게 즐기고 싶다면 복장을 제대로 갖추길 권한다. 우선 선글라스가 있으면 좋다. 위에서 내리쬐는 햇살뿐만 아니라 땅 위에 쌓인 흰 눈도 빛을 반사해 눈을 괴롭히기 때문. 피부 노화를 재촉하고 싶지 않다면 선크림도 두껍게 바르자.
눈밭을 거닐고 싶다면 접지력이 좋고 발목이 높으며 잘 젖지 않는 신발을 신자. 평지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상당히 두껍게 쌓여있다. 누군가 발이 빠진 곳에 짐벌을 들이밀어 깊이를 가늠해 봤는데 거진 60~70cm는 들어간 것 같다. 잘못 빠졌다간 눈 녹아 시냇물 흐르고 개구리 울 적에 밖으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