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순간은 기록하지 않아도 영원하다.
최근 SNS에서 흥미로운 글을 봤다.
'디지털 저장 강박증 테스트'라고 10가지 문항에 네, 아니오로 답하는 테스트였다. 처음 듣는 말이네 재미 삼아해볼까 하고 문항을 읽어보는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10개 모두 '네'!
다들 이렇게 살지 않는다고?
끝끝내 지우지 못해서 초안, 수정 1, 수정 2, 최종 버전이 모두 남아있는 파일들과 혹시나 사라질까 봐 USB와 외장하드, 클라우드에 차곡차곡 백업해 둔 사진들이 떠올랐다. 애써 나는 성격이 꼼꼼한 것이라 포장하며 감춰왔지만, 기록 강박은 어린 시절부터 지독하게 달라붙어 아직도 떨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수험생활동안 사용한 참고서와 문제집을 서른이 되는 나이까지 버리지 못한 것은 그것을 내가 치열하게 살았던 훈장으로 여기기 때문일까. 책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을 보면서 저걸 다시 펼칠 날이 있을까 싶다가도 막상 버리려니 아쉬워 이삿짐을 쌀 때도 상자에 꾹꾹 눌러 담았다.
버리지 못한 책들은 내 수험생활의 기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교시절 추억은 졸업 후에 사진 한 장도, 책 한 권도 펼쳐본 적 없다. 즐거웠던 추억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던 사소한 순간이었다.
짧은 쉬는 시간 동안 매점에 가려고 옆 건물까지 친구와 뛰어가던 순간.
야자시간에 계단에 숨어 친구들과 치킨을 먹던 순간.
국어 모의고사 지문이 슬퍼 반 전체가 훌쩍이던 순간.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어떤 것보다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순간들.
몇 주 전, 엄마는 진주남강유등축제를 다녀오면서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 풍경이 너무 예뻐서 그냥 눈에만 담아 오고 싶었다고 한다. '완벽한 사진'이 아닌 내 오감을 집중해서 느끼는 순간.
어떤 순간은 기록하지 않아도 영원히 남는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면 기록이 없어도 그 순간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