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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r 15. 2022

그림형제 동화는 왜 잔혹할까?

그림형제의 길, 손관승, 바다출판사



지난여름 휴가지에서 만난 손자는 나를 힐끗 보더니 블록을 만지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늑대 배를 갈라서 돌을 집어넣고 실로 꿰매는 거야.” 


이따금 녀석이 오면 나는 잠들기 전 책을 읽어줬는데, 한두 편을 들려주면 목이 아파서 읽을 수가 없었다. 꾀를 낸 게 구연동화를 찾아서 틀어주는 거였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욕심 많은 개구리,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 새로 나온 동화들이 많은데, 나는 이상하게 이런 옛 동화를 아이가 쉽게 이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나를 만나니 녀석은 예전에 들려준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가 떠올랐던 것 같다. 


나란히 누워서 녀석과 함께 동화를 듣다 보면 잔혹한 게 많았다. 배가 터져 죽고, 삶아 죽이고, 떨어져서 죽고 등등. 어린이를 위한 동화가 왜 이렇게 잔혹할까?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의문을 가지곤 했다.




야코프 그림 Jacob Grimm, 빌헬름 그림 Wihelm Grimm. 이들이 만든 그림동화가 성인용이라는 말과 잔혹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친숙한 동화인데, 출처와 전해진 과정, 아이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는 이는 드물었다. 


저자 손관승은 오랜 기자 생활과 CEO 생활을 마친 후 에너지가 소진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때 우연히 어릴 적 읽었던 그림 형제 동화집의 <브레멘 음악대>를 보고 당나귀의 용기에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20년 전 특파원 시절 들른 적이 있던 독일을 찾아갔다. 그림형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행문이며 여행기, 전기문이며 역사서가 이렇게 탄생했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은데 내용이 방대했다. 나는 흥미로운 내용을 정리해 봤는데 너무 길어서 리뷰라 하기에 적절치 않아 그간 어디에도 올리지 못했다.


독일은 어느 마을에 가던 중심지에 교회가 있고 그 뾰족 탑 위에는 금빛 닭이 있다. ‘빈트휘너’라 부르는 풍견계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이 닭은 새벽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 인간의 나약함과 후회를 상징한다. 

‘빈트휘너’는 바람과 야생 닭의 합성어로 ‘바람의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는 닭’을 의미한다. 지식인은 풍견계와 같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곳에 홀로 서 있는 존재. 무난하기보다 깨어서 시대와 마주해야 한다. 


귄터 그라스는 ‘풍견계의 이점’이란 풍자 시에서 풍견계를 정치와 사회를 미리 읽고 내다보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그림 동화집 초판은 1815년에 출간됐다. 이때 독일은 외국 군대의 지배하에 있었고,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을 수 있었던 힘든 시기였다. 그때 형제가 착수한 일이 민담(메르헨)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형제는 옛이야기 속에 건강한 독일 정신과 로마군을 무찌른 게르만 전사의 용감한 기상이 숨어 있으리라 믿었다. 모두가 큰 목소리로 외칠 때 형제는 주변의 작은 것에 눈을 돌렸다. 

그들이 수집한 동화는 분열된 독일을 통일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후일 그림 동화집은 세계 160개국에 번역되었고, 영화와 드라마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어 스토리텔링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림 형제는 본래 동화 작가가 아니라 동화를 수집한 학자였다. 도서관 사서로 출발해서 게르마 니스 탁이라 부르는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로, 독일어 사전을 편찬한 이였다. 두 사람은 외교관, 저널리스트, 문헌 학자로 평생을 한 지붕 밑에서 살았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직장을 다녔으며 집필과 연구를 공유했다.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시기, 괴팅겐 4 교수 사건으로 보듯 불합리하다 느낄 때 세상을 향해 말하는 사람이었다  

형은 내성적이었고 동생은 외향적이었다. 학자로서의 성취는 형이 앞섰고, 교사로서의 역할은 동생이 나았다. 형은 꼼꼼하고 학술적이었고 동생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림 동화집의 문체는 위대한 스토리텔러인 동생의 것이다. 


숲은 게르만 족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인들은 깊은 숲과 마녀가 나오는 <헨젤과 그레텔>을 가장 독일적인 민담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을 정신적 교육적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림 형제는 책벌레여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은 매우 비쌌기에 형제는 책을 빌리면 반드시 두 개를 필사해 하나는 다른 학생에게 팔았다. 그러는 사이에 책의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해 금방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다. 

1803년 이들은 지도교수의 개인 도서관에서 <중세연애가집>을 읽고 중세 문헌학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데 독일 문학계는 이를 가리켜 게르마니스탁 Germanistik, 독어독문학 탄생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파리에 가게 된 야코프는 파리의 도서관과 문서 보관서에서 고대 독일 문학과 관련된 귀중한 자료를 찾았다. 이는 고도의 정신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문헌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문헌학이란, 어떤 민족이 남긴 모든 종류의 문헌을 연구하여 그 민족, 특히 옛 시대의 문화를 알리는 학문이다. 

1806년 신성 로마제국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프랑스 군대가 들어왔다. 나폴레옹의 동생이 군주로 부임했다. 1808년 야코프는 왕실 도서관 사서로 추천받았다. 


프랑스 지배자들 밑에서 일하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피지배자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옛 문서와 고서적을 뒤져 독일적인 정체성을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책이 귀하고 비쌌던 시절이라 도서관 사서는 준 문헌 학자에 속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지만 정치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민과 갈등이 커져갔다. 점령국의 녹을 먹고 산다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비록 국토는 점령당했지만 결코 점령되지 않는 것, 정신의 세계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는 열정밖에 없었다. 그 열정으로 고대 독일 연구를 했다. 세계적으로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평화로운 가운데 단지 과거 속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희망도 당연히 있었다.”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있다. 한 시대에 우뚝 솟은 굴기의 정신을 말한다. 헤겔은 이를 ‘세계영혼’이라고 표현했다. 이 모든 것은 나폴레옹을 향한 표현이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갈 때 유럽은 나폴레옹의 시대였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가 세상을 해방시켜줄 것이라 믿었다.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실현해서. 하지만 나폴레옹은 점차 다른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배와 억압, 말을 탄 시대정신이라고 사람들은 비아냥거렸다. 


독일에서 프랑스 침략에 대한 범 독일적인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 강연이 있었다. 반응은 뜨거웠고, 처음으로 독일, 독일어, 독일적이란 표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1812년 『그림 동화집』 초판 제1권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6년의 세월을 거쳐 오로지 두 형제의 힘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민족적 뿌리의 가장 순수한 정신적 근원’을 동화라 생각했다. 

메르헨은 창작 동화와 민담으로 구성되는데 그림 형제 이전엔 창작이 대세였다. 민담은 시대에 뒤떨어진 미심이라고 경시되었다.

메르헨 Märchen이란 말은 마르틴 루터가 '복음 Gute neue Mär'이라 한 말에서 유래한다. 메르 Mär는 짧은 이야기란 뜻이었는데 그림형제가 이 단어를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민담’이라 번역하지만, 국제화된 용어라 많은 나라에서 번역 대신 그대로 ‘메르헨’이라 쓴다. 


초판을 발간한 이후 그림 형제는 점차 메르헨이 독일 순수 민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정리노트에는 러시아, 핀란드, 일본,  아일랜드, 많은 나라에 대한 주석이 적혀있다. 이야기의 뿌리와 형성 과정을 추적한 흔적이다. 그림 형제는 그들의 주요 저작물 앞에 예외 없이 독일이라는 뜻의 'Deutsch'를 사용했지만 ‘그림 동화집’에는 붙이지 않았다. 

상당수 이야기가 독일적 뿌리를 가진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거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그들에 앞서 많은 이들이 동화를 내놓았지만 가장 성공한 게 ‘그림 동화집’이었다. 이유는 남다른 문체와 스토리텔링 방식 때문이었다. 기원이 순수하게 독일적이지 않아도 독일어로 쓰인 이야기책을 통해 분열되어 있던 독일인들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구심점과 정체성을 찾게 되었다. 책은 아이들에게 꿈을, 어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1846년 처음으로 게르마니스트 회의가 열렸다. 학자들은 지금까지 바이에른 왕국, 헤센 공국, 작센 왕국으로 각각 다른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 이제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독일인’으로 함께 모였다.  제1회 게르마 니스트 의장으로 야코프 그림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일 년 후 제2회에서도 야코프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내가 좋아서 한 것은 커다란 대로에서 옆으로 비켜나 좁은 밭고랑을 갈고 누구도 따려고 하지 않는 숨은 초원의 작은 꽃을 따는 일이다.” -야코프 그림, ‘독일어 역사’ 서문에서.




독일 베를린에 유서 깊은 훔볼트 대학교가 있다. 본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정면에 이 대학의 가장 유명한 졸업생, 카를 마르크스가 한 말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단지 다양하게 해석하기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꾸는 것이다.” 


분단 시절 동독 공산당이 새긴 것인데,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그것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결론이 내려져 오늘까지 남아 있다. 다양한 이념의 스펙트럼을 인정해주는 관용주의다. 


훔볼트 대학도서관 humboldt university library, Berlin(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이 대학에 세계 최고의 실용성과 혁신적 감성을 자랑하는 중앙 도서관이 있다. 정식 명칭은 ‘야코프와 빌헬름 그림 센터’다. 훔볼트 대학을 거쳐 간 유명 인물은 너무나 많다. 테오도어 몸젠,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로버트 코흐 등 노벨상 수상자가 29명이나 된다. 


그럼에도 대학은 왜 200년간 학교를 빛낸 최고의 영예를 그림 형제에게 돌렸을까? 

무엇보다 그림 형제는 지식의 공유와 전파에 평생을 바친 도서관 사서였기 때문이다.




지난달에 손자에게 '돼지 삼 형제와 늑대 이야기'를 읽어줬다. 

볏짚으로 지은 집, 나무로 지은 집, 벽돌로 지은 집. 


셋째 돼지가 영리해 늑대를 속여서 골탕 먹이는 내용인데, 마지막 삽화가 굴뚝으로 들어온 늑대가  뜨거운 냄비에 풍덩한 후 돼지가 늑대 가죽을 깐 의자에 앉아 쉬는 장면이었다.


그림에 먼저 눈이 간 녀석이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이어서 녀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가장 나쁜 건 늑대가 아니라 셋째 돼지예요."

녀석은 부르르 떨며 말했다.


뭔가 셋째 돼지의 행동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림형제의길_손관승_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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