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할 때 남편은 자기 방을 달라고 했다. 신혼 때는 두 살 터울로 태어난 아이들 때문에,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아이들에게 각자 방을 주느라 여유가 없었다. 방 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모든 요구에서 남편은 항상 마지막 순서였다.
왜 방이 필요하냐고 물으면 남편은 “그냥”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거기 들어가서 졸기도 하고 넋 놓고 있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막내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아이들이 모두 집을 떠났을 때 나는 큼직한 책상을 하나 샀다. 책상은 양팔을 벌려도 끝이 닿지 않게 넓었고 의자는 목 받침대가 있어서 몸을 뒤로 젖히면 뒤로 45도까지 넘어갔다. 책상은 변변한 자기 물건 하나 갖지 못한 남편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었다. 현관 옆 제일 큰 방에 책상을 들여놓고 나는 그 앞에 앉아서 글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남편을 상상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방의 책상 위에는 컴퓨터 앞에 온갖 것들이 널려있다. 습작한 종이, 머그잔, 색색의 볼펜, 포스트잇, 탁상 달력, 읽다가 시옷자로 엎어 둔 책. 그 방의 주인은 남편이 아니다.
“이제야 내 방이 생겼나 했더니, 슬그머니 저 사람이 그 방을 꿰차지 않겠어요.”
남편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남편은 어디에 있나? 그는 퇴근 후 집에 오면 텔레비전 앞 거실 소파에 앉는다. 저녁 먹으러 식탁에 올 때 한 번, 베란다로 담배 피우러 갈 때 몇 번 일어난다. 피곤하면 옆으로 길게 드러눕고, 신문을 볼 때면 스르르 내려와 카펫에 앉으니 그럴 때는 소파가 등의자가 된다. 남편이 늘 앉는 자리는 소파의 가죽이 벗겨져 검정 바탕에 하얀 밀가루가 점점이 뿌려진 모양새다. 그곳의 한 지점에 컴퍼스 바늘을 꽂고 한 바퀴 돌리면 남편은 사방 일 미터 원 안에서 움직인다.
“방 달라면서요. 저 방 써요.” 하면, 남편은 “그 방은 내 방이 아니네.” 한다.
비싸게 사준 책상에 왜 안 앉느냐고 물으면 그건 자기 취향이 아니란다.
“커다란 교자상 하나 펼쳐놓고 거기 앉아 있고 싶어!”
책상이 있는 큰 방은 내 방이 되었다. 문을 닫으면 거실 TV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텔레비전 끕시다.” “소리 줄입시다.” 잔소리할 필요가 없다.
저녁마다 나는 그 방에서 자유롭고 행복하다. 조금 신경이 쓰이는 건 남편 때문이다. “나, 잔다.” 하면서 문을 삐죽이 열고 들여다볼 때 표정이 너무 시들해서다. 잠잘 시간이 되어서 오는 피로감과 다른 무엇이 남편의 얼굴을 덮고 있다. 결국 나는 거실 창가에 신혼 때 쓰던 작은 식탁까지 하나 갖다 놓았다. 거기도 그런대로 괜찮다. 책 읽다가 남편과 한 번씩 이야기하고, 창밖도 내다보고. 비 오는 날이면 베란다 새시에 매달린 빗방울도 보고, 빗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러던 남편이 요즈음 다시 방 타령을 시작했다. 얼마 전 책을 한 권 읽더니 자기의 공간, ‘슈필리움’이 필요하다 했다.
『바닷가 작업실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서 김정운 작가는 독일어에만 있는 ‘슈필리움(Spielraum)’이란 단어를 소개한다. 우리말로 '놀이(Spiel)'와 '공간(Raum)'을 합쳐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한다. ‘슈필리움’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의미한다.
저자는 한국 남자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헐크가 되는 건 자기의 방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자동차 운전석이 그들의 유일한 공간인 ‘슈필리움’이기에 내 앞의 공간을 빼앗기면 내 ‘존재’가 부정되는 거여서 그렇게 분노하고 적개심을 느끼는 거란다.
친구가 따로 살던 시부모를 모셔오면서 집을 고쳤다. 최대한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녀는 안방 뒤쪽 베란다를 침실로, 안방을 거실로 만들었다. 현관 옆에 나란한 작은 방 두 개를 터서 시부모의 침실과 거실을 만들었다. 고부가 종일 집에 있어도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거다. 넓은 집이어서 가능했다.
강변 산책로를 걷다 보면 낚시꾼들이 보인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었는데 점차 수가 늘어났다. 대부분 나이가 쉰은 넘어 보이는 그들은 평일 오전에 나와 있는 걸로 봐서 퇴직했거나 시간 여유가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딱히 물고기를 잡는 게 목적인 것 같지도 않다. 몇 번인가,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것도 봤으니까. 아내, 아이들과 나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늘 혼자다. 오래 앉아있을 걸 대비해선지 의자의 등받이에는 두두룩하게 쿠션도 넣었다. 그들은 종일 강물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늘 지나다니며 생각했다. 심심하지 않을까? 어쩌면 시선은 한 곳을 향하지만 머릿속은 사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모른다. 그들의 여행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다. 과거로 갔다가 현재 그리고 미래. 겉모습은 고요하지만, 가슴은 쉼 없이 일렁이며 압축한 파일을 열듯 과거를 풀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강 기슭 낚시터가 그들의 방, 슈필리움이었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그들의 영역. 충분히 돌아다니고 나면 강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겠지.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 바람에 떠밀려 포물선을 그리는 강물. 돌부리에 걸려 튀어 오르는 하얀 물방울, 나지막이 물 위를 나는 새, 자맥질하는 오리 두 마리, 건너편에 닿을 만치 길었다가 짧아진 나무 그림자. 문득 강 건너 둑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어제와 다르게 짙어진 수풀 빛깔을 느끼겠지. 생각에서 깨어나면 그제야 쉼 없이 흐르는 강물소리도 들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