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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r 17. 2022

우리 가족 자동차 연대기

포니에서 제네시스까지


80년대 초반, 직장 사택에서 살았는데 아들이 네 살이 되어 아파트 뒤에 있는 교회 선교원에 가게 되자 이웃 언니들이 이제 운전면허를 따야 한다며 분위기를 잡았다.


두어 살 터울로 넓게 십 년의 스펙트럼을 가진 여덟 명이 우르르 가서 운전 학원에 등록했다. 필기시험은 문제집을 사서 내용도 제대로 모른 채 사지선다형 문제를 달달 외웠다. 우리 중 두 명이 만점을 받았다. 실기는 학원에서 배웠는데, 막상 시험 칠 때는 당황해서 시동이 걸려 있는 줄도 모르고 키를 계속 삑삑 돌려 옆에 앉은 시험관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S자 커브길 후진할 때는 바퀴가 도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다들 합격했다.


면허증을 딴 후 운전 연수는 남편에게 받았다. 지금도 운전이 두려운 나는 그게 남편 탓인 것만 같다. 아파트 근처 한적한 도로에서 운전을 연습했는데 두 번 정도 인도로 올라갔고, 전봇대를 한 번 박을 뻔했다. 남편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어찌나 구박하는지 이틀 만에 연수를 접고 말았다. 곧은길에서 달달 떨면서 차를 비틀비틀 모는 걸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오래 배웠으면 이혼했을지 모른다.


“이 실력으로 도대체 어떻게 면허증을 땄냐!”

그러면서 자기 동료 이야기를 덧붙였다.


S대 출신인 친구는 필기시험을 일곱 번이나 떨어져 순식간에 우리 동네의 전설로 등극했다. 운전도 이미 잘했다. 살살 몰고 다닌 건 비밀 아닌 비밀. 그런데 특이하게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별 수 없이 아내가 그를 출퇴근시켰다.


“필기 떨어진 사람도 운전만 잘하는데.”

남편의 주장이다.


그때 과감하게 거금을 투자해 운전 연수를 받았다면 내 삶이 훨씬 윤기 있게 변했을지 모른다.

제대로 연수받은 친구들이 내게 자랑스레 말했다.

“연수 첫날이 제일 중요해. 고속도로로 나가야 해. 대청 댐 커브 길 몇 번 돌고 나면 이 정도 길은 시시하지. 도로에서 어리바리할 것 같으면 아예 운전대 잡지 말라 하더군.”

그때 남편을 믿지 말고 연수를 제대로 받았더라면 지금 서울, 부산을 날아다닐지 누가 알겠어.


면허는 땄지만 운전하는 게 싫었다. 자동차를 몰고 외출하면 돌아올 때까지 주차해 놓은 차에 마음이 가 있었다. 어떻게 집에 몰고 가지? 몇 년이 지나서 보니 같은 날 면허를 딴 이웃들은 베스트 드라이버부터 장롱면허까지 다양하게 변해 있었다. 물론 나는 후자였다.

세상에는 운전을 좋아하는 사람과 운전을 싫어하는 사람, 두 부류가 있었다.


면허증은 자연스레 장롱 속으로 들어갔다. 십 년이 지나서 불가피하게 다시 운전을 다시 하게 됐다. 큰 애가 기숙학교에 다녀서 수시로 아이들을 태우러 가야 했다. 운전이 힘든 건 나만이  아니었다. 장롱 면허인 친구는 차를 몰고 나온 첫날 운전 중 갑자기 비가 내렸다. 차에서 내리는 친구를 보니 얼굴이 샛노랬다. 친구는 윈도 브러시 작동 법을 몰랐다.


80년대 중반, 우리의 첫 번째 자동차는 파란색 포니였다. 그나마 형편이 넉넉했던 남편 선배가 외국으로 유학 가면서 쓰던 차를 물려주고 갔다. 사택에 살던 세 가족이 그 차를 함께 이용했다. 그러니 근 열 명이 교대로 차를 타고 다닌 셈이다. 그래도 별로 불편한 줄 몰랐다. 어차피 같은 직장에 출근하니 함께 타고 가고, 주말이면 함께 장 보고 주중에 필요한 집이 차를 쓰면 됐다. 우리는 카풀의 선구자였다. 포니는 자동차 성능이 좋았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 가족의 두 번째 차는 자주색 엑셀이었고, 세 번째 차는 검은색 에스페로였다. 모두 중고차다. 새 차를 살 여유도 없었고, 일이 년 된 중고차일수록 가성비가 좋았다. 엑셀을 타고 가다가 비가 내리면 차 안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후덥지근했던 여름이 떠오른다. 에스페로는 한 번 견인을 당하다가 부서져서 다음 차로 옮겨가야 했다. 전륜 구동인가, 후륜 구동인가 그게 이유였다.  


2000년대 초반 우리는 처음으로 새 자동차로 하얀색 SM5를 샀다. 아파트 대출을 거의 갚았고, 아이들 과외비 대느라 버벅거렸던 시기다.  남편이 이 차를 몰 때 나는 중고 빨간색 엑센트를 몰고 다녔다.


빨간색 소형차를 몰고 나가면 주변 차들이 빵빵 클랙슨을 울렸다. 이상한 게 후일 SM5를 내가 몰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경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운전 실력은 그대로인데 뭐가 달라졌을까? 낡아도 차가 커졌기 때문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SM5는 며칠 전 남편이 몰아보더니 아무 문제없이 잘 달린다 했다. 팔면 40만 원 정도 받는다. 폐차하는 값이다.


남편은 환갑 기념으로 회색 제네시스를 샀다. 차를 살 때 조금 고민했다.

‘십 년 후면 일흔인데 감각이 무디어져 사고가 지 않을까? 앞으로 작은 차를 몰아야 되지 않을까?’

그러다 걱정을 접었다. 그건 그 때고, 현재도 중요하지. 인생의 대부분을 중고차를 타고 다녔는데 마지막으로 좋은 차 한 대 사 주자 싶었다. 나의 은근한 강요에 아이들이 돈을 보탰다. 부모를 위해 큰돈 쓰는 거에 아이들이 익숙해져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돈이 곧 마음이다. 가고 오고. 정도 난다.


포니에서 제네시스까지 40년의 세월을 우리는 현재를 유보하고 미래를 위해 살았다. 요즈음 세대는 우리와 같지 않다.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고 아쉬움 없이 살려한다. 그런 삶의 차이를 어떤 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났고, 아이들은 선진국에서 태어나서 그런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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