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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5. 2022

프랑스 혁명사는 논쟁 중

자유, 평등, 박애?



1789년 7월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를 공격하면서 프랑스혁명은 시작되었다.

한 달 전, 프랑스 국민 의회는 30명으로 구성된 헌법기초의원을 발족했다. 대부분 온건했던 그들은 프랑스의 기존 제도를 성문법으로 정리하고 제도화하는 것을 임무로 생각했다. 그들은 왕정 전복을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를 여행 중이던 미국 정치인 거버너 모리스는 루이 16세가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고 이렇게 예언했다.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금의 모든 일은 그들이 장차 과녁을 크게 벗어날 것이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또다른 미국 정치가 토마스 제퍼슨도 당시 파리에 있었는데 그는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성공적인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 어느 정도의 피흘림은 불가피하며 프랑스 혁명은 미국 혁명과 같은 길을 갈 것으로 낙관한다."


모리스의 예견이 더 정확했다.        

역대 프랑스 왕 중 가장 온화하고 아무도 잔혹한 행위를 했다고 비난할 수 없는 루이 16세가 극악한 폭군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저자 김응종은 프랑스 낭트대에서 석사, 프랑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90년대 초반부터 서양의 역사, 프랑스혁명, 신앙과 관용의 개념에 관한 책들을 펴냈다. 2005년에는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푸른 역사)'를 출간했다.


책의 첫 문장에서 저자는 "역사는 대화이다." 라고 말한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의 대화, 역사가와 역사가의 대화이다. 아무도 본래의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증인에 의해 굴절되고, 역사가에 의해 다시 굴절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실'이라기보다 역사가의 해석이니 책의 제목처럼 끊임없는 논쟁, 대화가 필요하다.


프랑스 혁명 백주년과 이백주년에 혁명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다. 공식적인 공화주의 해석이었다가 백년의 시간이 흐르자 마르크스주의 버전이 해체되었다. 이후에도 혁명사는 끊임없이 논쟁 중이다.


저자는 서술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구체제를 타파한 위대한 사건이지만 다른 의미로 전대미문의 폭력을 야기한 비극이었다고.


혁명군에 의해 귀족의 선동으로 몰렸던 방데 전투는 민병대 소집에 대한 주민의 불만으로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혁명 이후에도 군대에 징집되는 것과 특권층이 징집에 제외되는 것에 반발했다. 이에 혁명군은 초토화 작전으로 응수했다. 한 마을의 노인, 여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고 마을을 사막으로 만든 방데 전투는 일종의 제노사이드로 어디에서도 혁명의 ‘인권’을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방데전쟁은 반혁명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사전에 이미 '악'으로 규정되었기에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 했다. 마찬가지로 리옹 반란도 전후 처리에서 '리옹'이란 도시의 이름을 잃고 '해방 도시'로 선포되었다.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저자는 2015년 개정한  한국 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의 '프랑스 혁명사' 부분을 살펴봤다.         


4종 교과서의 기술은 대동소이했다. 모두 혁명이 '구제도의 모순' 때문에 일어났다는 식이었다. 저자는 '모순'이란 용어는 혁명을 필연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보게 할 소지가 있기에 신중하게 써야 한다고 말한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이 대안 교과서로 2005년 출판한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도 위 교과서들의 역사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공포정치에 의해 1년 만에 50만 명이 투옥되고 3만 5천 명이 처형당할 정도였다."며 잔혹성을 강조했지만 가장 잔혹한 혁명가였던 마라의 죽음을 마치 순교자처럼 부각했다.

         

한국의 세계사 교과서 ‘프랑스 혁명사’는 천편일률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프레임에 갇혀 있거나 ‘혁명 찬가’에 머물러 있었다.

   

저자는 이제 혁명과 함께 반혁명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형제애를 세계에 전파한 위대한 사건이지만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일어난 부당하고 과도한 폭력에 대해 정당한 시선을 던지지 않고 있었다.    


책은 ‘폭력’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프랑스혁명을 검토하려 한다.


프랑스 국기



프랑스 국기의 파랑, 하양, 빨강의 삼색은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고 우리는 배웠다. 저자는 ‘박애’는 잘못된 번역이라고 말한다. 박애보다는 우애, 형제애가 올바르다고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유와 평등도 이상하다. 둘은 양립하기 어려운 관념이다.       

상식적으로 자유의 손상 없이 평등의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프랑스혁명에서 ‘평등’의 대가는 공포정치로 귀착되어 혁명에서 발표한 ‘인권 선언’의 모든 가치가 침해되었다. 좌절된 혁명이 맞이한 건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 헌법에는 아예 ‘인권 선언’이 없었다. 혁명의 시간 10년(1789~)이 지나 나폴레옹의 군주제(1799~)가 들어섰고 1814년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로 되돌아갔다.


"혁명을 하나의 덩어리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역사가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혁명의 다양하고 상호 모순적인 요소들을 탐구하고 상관관계를 따지는 데 관심을 가지는 역사가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p17


책은 1년 전에 발간되었어야 하는데 출판사의 사정으로 이제야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며칠 전 우리는 새 대통령을 맞았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외쳤다. 책에서 대통령이 말한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책은 혁명과 반 혁명, 혁명가, 혁명사로 전개된다.


#프랑스혁명사는논쟁중, 김응종,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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