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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08. 2023

#연말을_앞두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우리는 만나 기이한 인연을 맺는 걸까?

  


  ‘#연말을_앞두고_내가_최대한_늙어보일만한_사실을_말해보자’ 란 해시태그가 SNS에 뜨자 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이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던 이들이 추억을 핑계로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냈다. 

  학력고사를 봤어요. 2부제 수업. 라면이 60원. 삼촌이 월남전에…. 나의 애창곡은 ‘황성 옛터’. ‘꿀벌 마야’라고 들어 봤어요? 시발택시. 달력으로 교과서 표지를 쌌어요. PC통신. 마징가 제트. 아톰. 명화극장. 흑백 TV. 통금. 나이 든 게 무슨 자랑이라고 시큰둥하던 이가 ‘담배라면 청자’지 했다. 


  이 해시태그는 그간 노인을 딱딱하게 머리가 굳은 편협한 사람이라 여기던 사회적 분위기를 일순간에 풍성한 인생 경험을 간직한 가치 있는 존재로 변화시켰다. 




  가을에 남편과 수원 화성에 갔다. 바람에 쓰러진 갈대와 굳건한 성곽이 사연 깊은 과거의 어느 왕조를 떠오르게 했다. 행궁 뒤편에 작은 방들이 있어서 안을 들여다봤는데 내시의 방이었다. 이부자리만 장롱에 올려놓은 단출한 살림살이. 호롱불에 의지해 책을 읽는 내시의 모습을 보고 남편이 말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방 같아. 고등학교 입학할 때 전기가 들어왔어. 저런 촛불은 아니지만 호롱불을 켜놓고 책을 봤어.” 


  삼사십 년을 같이 살아도 이럴 때의 남편은 낯설기만 하다. 


  제주 시댁에 가면 우리는 여행의 가운데 날에 세화 바다를 찾는다. 바닷가에 자주 들르는 카페가 있다. 창문 아래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책 사이에서 마음에 와닿는 책 한 권을 고르고 커피를 마신다. 이따금 고개 들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저무는 겨울 해가 고요하고 적막한 부부의 나들이를 일깨워 귀가를 독촉한다. 


  시댁 근처에 다다르자 운전하던 남편이 뉘엿한 바깥을 내다보고 말했다. 

  “이맘때면 지게에 짐을 한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늙어 보일만한 사연을 말하자면, 남편이 단연 우승감 아닐까? 아니다. 

  그날 밤, 해를 넘기면 아흔일곱이 되는 아버님이 이야기를 다시 풀어놓았다. 감당했지만 삭히기 힘든 일들.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아버님을 포함한 마을 사람 네댓이 성산포로 끌려갔다. 부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멀리서 유심히 쳐다보던 군인이 달려와 옆에 있던 오 씨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는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으로 일제강점기에 남양군도에서 오 씨와 함께 있었던 전우였다. 그가 중대장에게 사정했다. 


  소위 계급장을 단 서른 초반의 젊은이가 나타났다. 

  “여러분같이 무고한 사람들을 연행 해오라는 게 아닌데...”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우리는 만나 기이한 인연을 맺는 걸까?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묻힐 이야기라 순서를 물어가며 기억하려 애쓴다. 언젠가 풀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관심, 노력이 필요한지 모른다.


(2023년 1월 수필과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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