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차(6월 13일)
간밤에 로마에 도착했고 이틀 후 피렌체로 이동하기에 실제 로마에 머무는 건 이날 하루 밖에 되지 않았다.
보르게세 미술관과 그 뒤쪽 정원을 보기로 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입장권 끊기가 어려워 가이드 투어 방식을 택했는데 내가 알아듣기 힘든 영어 가이드였다. 한국어 오디오도 없다. 입장권은 마이리얼트립을 통해 구매했다. 트리플보다 비싸지만 취소가 가능하기에. 로마 현대미술관은 가려다 접었다. 미술관은 하루에 한 곳만 가기로 했다.
전날 물에 담가둔 누룽지를 한소끔 끓여 아침으로 먹고 숙소를 나섰다. (누룽지와 멸치볶음, 라면, 햇반을 각자 조금씩 준비했다. 나는 쌈장과 장아찌류를 지참. 쌈장이 의외로 인기가 좋았다)
길을 가다 성당이 있으면 들어갔다. 로마 성당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이날 오전에는 미사가 많았다. 뽀얗게 나이 든 사제들이 고해실에 나란히 앉아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한국말로 고해하면 사제는 뭐라고 할까, 잠시 상상했다.
미사 중이어서 뒤쪽에서 잠깐 참례하는데 한 수녀가 늦게 오더니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거였다. 일행 다섯 중 둘이 신자인 터라 우리 둘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의 기도에 내 마음을 얹었다.
베드로 성당에서 베드로를 묶었다는 쇠사슬을 보고 콜로세움으로 가니 10시경인데 이미 인파로 북적거려 외곽에서 사진만 찍었다. 이날 로마는 이따금 보슬비, 점심 무렵에는 거리에 물이 넘칠 만큼 폭우가 내렸다. 우리는 미술관, 가게, 식당으로 비를 건너뛰며 다녔다.
판테온은 대기 줄이 길어서 입장을 생략하고 광장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었다. 웨이터에게 팁을 줬는데 과도하게 고마워하는 분위기라 의아했다. 피렌체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자릿세를 내는 곳은 팁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트레비 분수는 사람들 붐비는 목욕탕 같았다. 한증막. 기겁하고 빠져나왔다.
비를 피할 겸 12시 되기 전에 식당을 찾아갔다가 면박을 당했다. 5분 전에도 입장이 불가했다. 마음이 상한 우리는 야박한 마음에 첫 손님으로 동양인이 찾아와서 저러나 했다. 일종의 피해의식이었다.
다음날 피렌체로 이동하던 중 가이드의 설명에 의문이 풀렸다. 문 여는 시간이 식당마다 다른데 어기면 옆 식당에서 신고한다고 했다. 우리더러 오라고 호객 행위를 하던 식당은 11시에 문을 여는 식당이었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두 곳 다 12시 오픈이었다. 식당에 들어갈 때도 입구에서 웨이터를 기다리는 게 예의다. 인원수를 말하고 안내에 따라 입장해야 한다. 성질 급한 한국인들은 좀 힘들 것 같다.
구글에서 부근 레스토랑을 검색하면 평가 수치가 뜬다. 평이 좋아 찾아간 곳은 파스타 면을 직접 뽑는 곳이었는데, 그러면 뭐 하나. 가락국수같이 굵은 면이 설익어 입 안에서 굴러다녔다. 이런 정도의 익힘이 이곳 사람들 취향일 수도 있었다.
음식 주문은 늘 힘들었다. 후반에서야 고기, 생선, 오징어, 문어.. 같은 식재료로 주문하는 방식을 터득했지만, 초반에는 좌충우돌이었다. 우리를 상대하는 그들도 상당히 귀찮았으리라. 식사 후 레몬 첼로를 줬다. 레몬에 생강이 들어간 술인데, 식후 입가심 용인 것 같았다.
보르게세에 입장하기 전 정원을 둘러봤는데 비에 젖어 푸른 나무들과 인적 없는 연못이 나는 미술관보다, 트레비 분수보다, 이곳이 더 좋았다.
가이드의 설명을 못 알아들을 거라 입장하자마자, 혼자서 돌아다녔다. 친구 둘도 설명 들으며 한 자리에 서 있는 게 걸어 다니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 시간 남짓 후에는 포기하고 아래에 내려와 일행을 기다렸다.
점심으로 먹은 음식이 짰는지 갈증이 가시지 않아 1층 뒤쪽 카페를 찾아갔다. 메뉴를 둘러보니 레모네이드 담긴 큰 유리병이 눈에 띄었다. 3유로에 얼음 넣은 레모네이드 한 잔이 내 앞으로 왔다. 그날의 갈증이 그 한 잔으로 모두 채워졌다.
미술관 예약은 이른 아침이 좋은 것 같다. 우리야 표를 끊지 못해 오후 5시에 입장했지만. 돌아다니느라 한껏 지친 상태라 보르게세 미술관에 위층이 두 개나 더 있는 걸 몰랐다. 바보 같으니라고. 생각보다 소장품이 많지 않네 했다는. 오후에 미술관을 들러야 해서 체력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지쳤다. 미술관에 들어서니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 버렸다. 보조 배터리를 사 갖고 갈 걸.
보르게세에는 베르니니의 조각과 카라바조 그림이 있다. (보르게세 검색하면 다 나오므로 생략) 베르니니의 조각은 여행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나 영화(리들리 스콧 감독의 '어느 멋진 순간')를 보던 중, 증권사 회장 방에 있는 모작이 저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베르니니의 작품, '페르세포네의 납치'에서 허벅지를 부여잡은 손의 표현이 놀라웠다. 나폴레옹 여동생이 기억에 남는다. 상당히 미인이었다. 관람은 2시간 한정이다. 마치고 나오니 비가 그치고 제법 쌀쌀했다. 날씨 덕분에 하루에 온탕, 냉탕, 한 여름, 서늘한 가을을 모두 겪었다.
저녁 식사는 식당 들를 기운이 없어 숙소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내일 피렌체로 이른 시간 출발해야 해서 일찍 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