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6월 15일)
여행 일정을 짜면서 친구는 피렌체에 머무는 날짜는 아무리 길어도 넘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시 전체가 유적이고 볼거리여서.
우피치 궁전을 가기로 했다. 여행 다녀온 지 사흘 지났을 뿐인데 벌써 그날이 그날 같다. 일정표와 사진을 찾아 회상한다. 8시 30분 가이드와 만나기로 했기에 한 시간 전 숙소를 나섰다.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베키오 다리를 수없이 오갔다. 숙소가 다리 옆이라.
걸어가노라면 베키오는 다리란 느낌이 없다. 탄탄한 돌바닥에 다리 양쪽에 귀금속 상점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건너편 트리니타 다리나 우피치미술관에서 보면 베키오다리가 더 잘 보인다. 안보다 바깥에서, 떨어져서 볼 때 실상이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다리는 긴 세월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버텼을까?
상점 진열대의 알 굵은 반지 아래 가격표를 원화로 셈했더니 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명품 샵이 어느새 군중 많은 이곳으로 진출했나 보다.
문을 연 빵집이 있기에 사진을 찍었다. 이태리에 와서 제대로 된 빵을 아직 먹지 못했다. 이곳은 저녁 일곱 시면 슈퍼와 빵집이 문을 닫는다. 숙소로 돌아올 무렵이면 문 닫은 빵집만 만나기 일쑤였다. 오늘은 반드시 빵을 사리라. 바다 건너지 않은 신선한 밀로 만든 진정한 유럽의 빵 맛을 보리라.
우피치 미술관 들르기 전 사람들이 줄 선다는 파니니 가게를 찾아갔다. 파니니의 빵 맛은? 흠, 뭐라 해야 하나. 좋게 표현하면 담백, 솔직하게 표현하면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빵이다. 어딘지 익숙한데... 생각했더니 예전에 내가 전기 제빵기로 만든 식빵 맛이었다. 무미한 쌀밥을 우리가 싫증 내지 않고 먹듯 이들도 이 딱딱한 빵을 물리지 않고 뜯어먹겠지.
성모와 아기 예수, 다비드상. 유럽 미술관의 그림과 조각으로 이들보다 더 소비된 소재는 없을 것 같다.
가이드는 아이패드에 담긴 화가의 다른 그림까지 보여주며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로 이어지는 화풍의 변화를 설명했다. 우피치 미술관의 복도는 막강한 재력으로 천재 화가들을 후원한 메디치가의 유령이 감도는 듯했다. 카라바조의 "메두사"를 본 탓일까?
미술관 관람보다 지치는 일이 어디 있을까?
목은 마르고 배도 고프고, 공교롭게 멋진 디너를 맛보러 찾아간 달오스테 분점은 문을 닫았더라. 어디 가서 허기진 배를 채우나?
급히 검색해서 간 곳은 토스카나 음식 전문점이었다. 지치면 다들 정신이 몽롱하다. 티본스테이크를 주문하라기에 여자 다섯이 제각기 말하다 보니 3킬로를 주문했더라. 왜 인당 300그람, 1.5킬로면 충분하단 생각을 못했을까? 그래도 별로 남긴 건 없었다. 핑크 빛깔 로제 와인을 주문했는데 소통의 문제인지 백포도주가 나왔다. 모스카토, 달달한 스파클링 와인을 우리는 두 병이나 마셨다. 알딸딸해서 집으로 오던 길, 산타 트리니타 다리에서 일몰을 보며 기타 연주를 듣던 나는 흥이 났다.
다음날 아침, 친구가 "어제 입은 원피스 예쁘던데, 그거 입지?" 권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피렌체 떠나기 전엔 그 옷 안 입을 거야." "왜?" "누가 알아볼까 봐." 그게 내 한계였다.
어쩌다 갑자기 해 지는 트리니타 다리 위에서 춤추는 게 버킷 리스트로 떠올랐는지. 모든 건 모스카토 와인 탓이지, 뭐.
숙소로 돌아오다가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한 친구가 그의 얼굴을 알아봤다. 신혼 여행 중이라 했다. 부인이 친절하게 우리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행복하게 사세요!" 헤어지면서 마음을 담아 덕담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