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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훈 Sep 03. 2020

태국 사람, 달고나, 엄마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오 년 전 가을, 당시엔 여자 친구였던 지금의 아내와 태국여행을 떠났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 앞에는 작은 야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하루의 관광을 마치고 들어가는 길에 간단한 주전부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그곳엔 과일주스를 파는 훤칠한 청년이 있었다. 과일주스를 좋아하던 아내는 며칠 동안 꼭 그곳에서 과일주스를 샀다. 그는 꽤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과일주스를 주문하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세 번째 그곳을 방문했던 날, 여느 때처럼 뒤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나에게 그는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에겐 농담을 섞어가며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던 그는 내게 태국어로 말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내게 그는 두세 번쯤 더 태국말로 말하더니 다시 영어로 물었다.

 “Where are you from?”(너 어디서 왔니?)

 “I’m from korea.”(난 한국에서 왔어.)

 그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oh! you looks like thai.”(와 나는 네가 타이 사람인 줄 알았어.)

 아내는 옆에서 이미 빵 터졌고,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우리가 주문한 두 잔의 음료와 함께 망고 한 조각을 썰어 봉지에 담아주었다. 난 숙소에 들어와 망고를 씹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나 한국사람처럼 안 보여?”

 “난 매일 보니깐 몰랐는데 얘기 듣고 보니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호텔의 커다란 거울 속엔 동남아의 뜨거운 햇살을 정통으로 맞으며 더욱 까매진 내가 있었다.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눈과 짙은 눈썹을 가지고 있는 얼굴이 까만 피부와 만나자, 그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방콕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현지인들과 무척 닮아 있었다.

 남은 여행 일정을 소화하며 나는 그보다 더욱 까매졌고,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본 엄마는 “태국 갔다 오더니 아예 태국 사람이 돼서 왔네.”라고 말하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난 이게 다 엄마 때문이라며 장난스러운 투정을 부렸고, 엄마는 실제로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날 베고 있었던 그때의 일을 말해주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내가 태국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을 만큼 까만 건 흑설탕으로 만든 달고나 때문이었다.

     

 나를 베고 있던 엄마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무렵, 아빠는 회사에서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남산만 하게 불러버린 배를 보며 울적해하던 엄마의 용건은 ‘단 게 먹고 싶다.’였다. 통금이 없어진지도 몇 년 지나지 않았던 그 시절, 밤늦게까지 하는 편의점이 있을 리 없었다. 야근 중이던 아빠는 거리를 헤맸지만 그 어떤 ‘단 것’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회사로 돌아왔고,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탕비실에 비치된 까만 흑설탕 봉지. 고민 끝에 그걸 통째로 들고 돌아온 아빠는 엄마에게 달고나를 만들어 줬고, 엄마는 무척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흑설탕 1kg이 들어있던 그 봉지는 채 이주일도 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고, 여전히 단 것을 찾는 엄마에게 아빠는 새로운 흑설탕 봉지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내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엄마는 5kg 정도의 흑설탕을 해치웠다. 그리고 1986년 3월 16일, 나는 머리를 빽빽하게 덮은 검은 머리칼을 자랑하며 태어났고, 딱 그만큼 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그제야 ‘임신했을 때 흑설탕을 먹으면 아기가 까맣게 나온다더라.’라고 하는 세간의 말을 떠올렸다. 새로운 가족이 된 나를 안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제일 먼저 찬장에 들어있던 흑설탕을 몽땅 버렸다. 그렇게 흑설탕이 사라진 집에서 내 동생이 나왔다면 태국에서도 현지인 대접을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4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우량아로 태어난 나를 45킬로그램의 엄마는 자연분만으로 낳았다. 의사는 위험할 수 있으니 제왕절개 하자고 말했다. 아빠도 할머니도 그러자고 했지만, 엄마는 또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는 건강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모양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엄마는 끝까지 제왕절개를 거부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엄마에게 수혈할 피를 구하러 온 동네를 돌아다니던 아빠는 그 순간 내가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그 난리를 겪으며 엄마는 힘겹게 날 낳았고, 둘째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 같아도 ‘산모와 아이 중에 선택하셔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서 둘째를 계획하진 못했을 듯싶다.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을 고통을 줬던 내게 엄마는 ‘흑설탕을 먹지 말걸 그랬어.’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흑설탕으로 만든 달고나로 시작된 엄마의 출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오싹했다. 아빠는 상황이 조금이라도 악화되면 의사에게 “전 아이를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최악의 상황을 막은 것은 전적으로 엄마의 의지였다. 아빠를 원망할 수는 없겠으나 내가 세상에 나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엄마 쪽의 공이 더 크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엄마는 매일같이 흑설탕으로 달고나를 만들어 먹었고 그렇게 태어난 나는 무척 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다. 그 말도 안 되는 인과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엄마가 실제로 후회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 임산부의 흑설탕 섭취가 아이의 까만 피부를 유발한다는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분명 무리가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아마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까만 피부 따위 아무려면 어떤가. 고작 흑설탕 따위로 미안해하는 엄마를 보며 미안함과 감사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엄마와 함께 달고나를 해 먹어야겠다. 캐러멜로 까맣게 색을 입힌 달디 단 흑설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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