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라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이유
나 혼자 산 탄다(4)
산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한때 생각했다. 도대체 저 오르막길을 왜 오르는 걸까? 올라가면 다시 내려와야 하는데...... 왜 힘들게 굳이 올라가는 것일까?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산은 너무 높았고 그 높이를 감당할 만큼의 근력과 체력이 부족했었다. 다리에서는 근육통이 올라왔고 입에서는 피맛이 나는 것처럼 숨이 차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친구 따라 산에 올랐다가 황천길을 간접 경험한 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등산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나이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게 된 이후 일상 전반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취향에서부터 습관까지 나이라는 숫자만 바뀐 것이 아니라 '나'라는 한 인간의 본질적인 토대가 흔들릴만한 변화가 슬금슬금 나타났다.
어릴 때 커피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 어른이 될 것만 같았다. 어른들의 전유물로만 느껴졌던 것이 바로 커피였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세뇌 아닌 세뇌를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시험기간에 벼락치기를 한답시고 믹스커피를 몇 개 섞어서 먹었다가 속이 울렁거려 밤새 잠을 못 잤던 것을 계기로 서른 전까지 전혀 커피를 마시지 않는 취향을 갖게 되었다. 커피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불편함을 겪게 된다는 것을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직장동료가 기분 내서 커피를 사줄 때에도 저렴한 아메리카노 대신 비교적 비싼 논 카페인 음료를 골라야 하는 눈치를 봐야 했고, 업무차 방문 시에도 커피를 대접받으면 민망한 표정으로 커피를 먹지 못한다는 사족을 덧붙여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서른을 기점으로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논 커피 취향은 커피 취향으로 바뀌고야 말았다.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호주 멜버른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멜버른이 플랫화이트로 유명했는데 플랫화이트가 커피인지라 그 지방의 명물을 못 먹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언제 또 가게 될지 모를 곳인데 이왕 온 거 눈 딱 감고 먹어보자 싶어서 따끈한 플랫화이트 한잔을 쥐고 한 모금 마시는데...... 음? 생각보다 맛이 괜찮은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영원히 바뀌지 않으리라는 두리뭉실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변화는 본질적인 나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바뀌지 않는 것은 없다는 단순하지만 복잡한 진리에서부터 돌아와 결국 모든 것은 바뀔 수 있고, 그 바뀌는 요소들은 결코 나를 대변할 수 없다는 깨달음까지 얻게 만들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등산이었다. 정확히는 오르막길을 걷는 것. 오르막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따라서 힘이 드는 길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굳이 험한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는다. 평지와 오르막길이 있다면 열이면 아홉은 평지를 택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선택지를 택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어찌 보면 뻔한 그 선택지를 택하는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 등산이라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열중에 하나에 속한 사람처럼 보였다. 평탄한 길을 놔두고 굳이 오르막길을 걷는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오르막길을 오르는 이유를.
앞으로 절대 할 일 없을 것만 같았던 등산을 시작하게 된 것도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사실 크게 계기랄 것도 없다. 자연스러운 변화였을 뿐이다. 연어가 철이 되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나도 나이가 들어, 정확히는 때가 되어 등산을 하기 시작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 마찬가지로 절대 변하지 않는 취향 따위도 없다는 것. 그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이 나에게 있어 조금은 더 각별한 이유는 위와 같은 이유다. 평탄하기만 한 길을 걷는 것은 편하지만 사실 조금은 따분하고 재미없지 않은가? 반면 거칠고 경사진 길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스릴 있고 재미있다.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등산은 나에게 있어 인생이라는 길을 상기시켜주는 매개체이다. 그래서 등산을 할 때면 가끔 생각한다. '이 오르막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