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이방인》을 읽고 나서 혼란스러웠다. 스토리는 알겠지만 작가가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카뮈의 생애와 ‘부조리’란 주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성경에서 이방인이란 말은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을 불렀던 단어로 알았는데 소설 제목으로 쓰이니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왠지 그 단어는 또 나를 가리키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었기에 전국을 떠돌며 초등학교도 네 번이나 전학을 가야만 했던 나를. 진해를 시작으로 포천과 강원도 대관령 등 전방의 외딴 관사에서 살았기에 친구들과의 추억도 없던 나를, 친해질 만하면 이사를 갔으니 뿌리내리지 못하는 나무와 같았던 나를. 중학생이 되어서야 겨우 서울 변두리에 정착한 생활은 낯설고 어색했다. 마치 이방인처럼.
소설은 엄마의 자연사, 아랍인의 살인 그리고 주인공인 뫼르소의 사형 등 세 가지 죽음의 형태를 담고 있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라고 시작하는 첫 문장, 인간에게 부모 특히 엄마의 죽음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니, 호기심이 생겼다. 알제에서 선박 중개인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는 젊은 뫼르소는 양로원에서 온 전보를 통해 엄마의 부음을 듣는다. 무더운 날씨 속에 장례식을 치르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이는 슬픔도 보이지 않고 엄마의 나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며 무심한 듯 행동을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우연히 만난 전 직장 직원이었던 마리와 같이 수영을 하게 되며 탄력 있는 그녀의 젖가슴에 욕정을 느낀다. 웃긴 영화도 보고 정사도 나누며. 몇 번의 만남 뒤에 자신을 사랑하느냐는 마리의 질문에 사랑이란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마리가 원하면 결혼은 할 수 있단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극단적인 정직성이라고 하지만, 이 무슨 말인가?
그리고 얼마 뒤 평판이 좋지 않은 이웃인 포주, 레몽과 엮기게 된다. 레몽은 자신의 정부인 이슬람 여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그 결과 그녀의 오빠와 싸움을 하게 된다. 바닷가 별장에 초대된 레몽과 동행했던 뫼루소도 그들을 따라왔던 그 아랍인들과 싸움 뒤에, 또 우연한 해변에서 만남에 뫼르소는 총을 쏘게 된다. 눈부신 햇볕과 찌는 듯한 무더위에 머리가 아팠던 그는 첫 발을 쏜 뒤 잠시 뒤 네 번의 총성, 그것은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 같았다고. 그 표현은 내 마음도 불안하고 강렬하게 두드렸다. 결국 그는 살인죄로 기소가 되고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다.
카뮈는 뫼르소의 모습을 단문으로 관찰하듯 무심하게 그린다. 왜 그는 뫼르소라는 이상한 인물을 만들었을까. 아마도 지독히도 가난했던 알제리에서의 성장배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에 이 책을 발표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시대적인 반발이 절대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또한 그의 철학사상에 중요한 ‘부조리’를 소설로 형상화하지 않았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사형수와 같은 인간에 천착하면서. 큰 전쟁과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는 얼마나 혼란스럽고 또 좌절하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책의 2부에서는 재판과정을 소상히 다루고 있다. 당시 상황에서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아랍인을 죽인 것은 크게 처벌되지 않을 수도 있단다. 하지만 아랍인 살인으로 기소된 그의 재판은 엉뚱하게 엄마의 장례식에서 그가 보인 행동과 그 후 마리와의 정사까지 드러나면서 이상하게 흘러간다. 마침내 검사는 뫼르소를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죽인 사람으로 치부하고 부친살해보다 무감각이 더한 죄라면서 인간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논고를 펼친다. 그 말을 들은 배심원들 또한 수긍하면서 판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네 번의 총성은 계획적인 살인이 되고, 영혼의 도덕성으로 재판을 받는다. 재판과정에서도 뫼르소 자신의 설명은 배제되고 변호사가 대신하며 자신은 구경꾼과 같은 입장이 된다. 부조리한 재판정의 모습, 가장 가까운 엄마와의 관계에서도, 재판과정에서도 뫼르소는 홀로 있는 이방인의 모습이다.
살인을 하기 전까지 뫼르소는 삶에 관한 질문을 하거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는 사랑도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존재였다. 자유를 잃은 감옥에서 사형을 앞두고 사제와의 면담에서도 끝내 신도 거부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고자 한다. 무관심했던 자신과 자연이 형제와 같이 닮았다고, 엄마가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왜 애인을 만들었는지도 이해한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허무가 아닌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낀다. 마지막 부분에 세계가 가진 ‘정다운 무관심’이란 해석하기 어려운 그 역설적인 단어의 강렬함이라니.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고전들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다. 책의 내용을 좀 더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애와 시대적인 배경지식을 아는 만큼 깨닫게 된다는 것을. 예전에는 선입견 없이 작품 자체만 읽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방법은 한계가 많다는 것을 절감한다. 한 권의 책으로 작가를 파악한다는 것은 너무도 단편적인 지식이기에 고뇌어린 수고로 쓰인 작품을 폄하하지는 말아야겠다는 겸손도 배우게 된다. 당시 유명한 한 철학자는 카뮈가 기존의 관습과 도덕을 벗어난 뫼르소라는 복합적인 인간의 내면을 솔직하게 심층적으로 그려냈으며, 그 시대의 갈등을 요약하고 그 갈등을 살아가는 치열함을 통해 모순을 극복하려 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인식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어려운 그 말의 의미를 되씹어 본다.
이제 단두대의 사형을 앞두고 뫼르소는 자신과 닮은 무관심했던 자연이 정답게 다가왔다고 그래서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사형을 보러 오라고, 와서 증오의 함성을 질러달라고 초대한다. 사랑보다 더한 관심이 어찌 보면 증오일 수도 있을 테니까. 뫼르소는 결국은 합법적인 권력기관의 돌이킬 수 없는 폭력에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앞으로 카뮈 하면 내겐 ‘이방인’과 ‘부조리’ 그리고 ‘다정한 무관심’이란 역설의 단어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는 과연 뫼르소처럼 이방인이 아닌 삶을 살았던가도 반문해 보게 된다. 부모의 기대와 사회의 관습에 따라 살면서 나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뫼르소처럼 사랑과 인생의 의미도 생각 없이 관습적으로 순응적인 인간으로. 특히 결혼이란 선택과 자녀들의 육아와 교육에서도 숙고하지 않고 세상 기준으로 배운 데로 따르기만 했다. 솔직하게 내 마음의 민낯을 들여다보자면 사랑으로 착각한 이기심과 집착은 아니었는지.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다. 가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나의 죽음도 떠올려본다. 과연 제대로 살아온 것일까. 요즘 글쓰기를 하면서 진부하다란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내 삶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뫼르소의 엄마가 마지막에도 애인을 둔 심정을 나도 알 것만 같으니까. 이제 정다운 무관심을 가지고 이 봄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