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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Penguin Apr 12. 2020

망각, 신이 주신 선물?-(상)

memento - 림보에 빠진 삶

영화 메멘토 (2020)

- 안녕하세요, 저는 304호에 묵고 있는 셸비라고 합니다. 

- 뭐 도와드릴까, 레너드 씨? 

- 죄송합니다… 성함이,,?? 

- 버트. 

- 버트 씨, 제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전화 오면 받아서 알려달라고 여쭤봤을 수 있는데- 

- 모르겠다고요? 

- 제 생각에 제가 부탁드린 것 같은데... 전화 같은 거 받는걸 제가 잘 못해서요. 

- 당신이 얘기할 땐 눈 보고 말하는 걸 좋아한다면서요, 기억 안 나요? 

- 그게 문제예요. 제가 저기, 그 상태가,, 좀 이렇거든요. 

- 상태? 

- 제가 기억이 없어요. 

- 기억상실증인가? 

- 아니요, 그게 좀 다른데, 단기 기억이 없거든요. 내가 누구인지는 아는데, 머리에 상처를 입은 후에는 그 이후의 기억이 생기지가 않아서요. 모든 게 스르르 사라져 버려요. 너무 오래 얘기하면 말이죠, 제가 어떻게 이 얘기를 시작했는지를 까먹을 거예요. 우리가 예전에 만났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담에 당신을 만나면 이 대화를 한 것도 잊어버릴 거란 말이죠. 그래서 제가 좀 이상하거나 무례해도 그건 아마…

…  

제가 이 얘기를 예전에 했군요? 


버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 뭐 당신을 화나게 하려는 건 아닌데, 너무 이상하단 말이지.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우리는 이렇게 몇 번씩이나 얘기를 하고 있다니 말이야. 


메멘토 (2000) 중에서 


영화 <메멘토>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레너드 셸비라는 한 남자가 나온다. 그는 아내를 죽인 사람을 찾기 위해 애타게 헤매고 있지만 몇 분 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을 제외한 온 세상을 의심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현재 얻은 정보를 몸에 문신으로 새기기 시작한다. 적어도 자신의 몸에 새기게 되면 쪽지나 메모처럼 어디다 놨는지, 자기가 그런 걸 만들었는지조차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조각조각 나뉘어져 시간 흐름의 역순으로 우리에게 보여지는데 초반 이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혼란스러운 관객만큼 레너드의 인생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첫 화에 등장했던 레인맨 얘기처럼, 이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다음 질문을 짐작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레너드 셸비 같은 증상도 실제 존재할 수 있는 증상일까? 무수히 많은 한국 드라마들의 클리쉐로 편리하게 쓰이는 기억상실증은 그럭저럭 때맞게 기억이 돌아오며 행복한 결말을 만드는 소재로 쓰인다지만, 또 사람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잊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니 어찌 보면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는 얘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메멘토>나 <첫 키스만 50번째>처럼 어떤 기점을 시작으로 평생 새로운 기억을 새기지 못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그 인생은 너무나도 슬픈 인생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아무리 영화적 설정이지만 너무 극단적인 설정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억상실증을 겪고 있는 클라이브 웨어링 Clive Wearing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차라리 영화 속 레너드 셸비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의 기억력은 대략 7초 정도, 혹은 그것보다 더 짧게 유지되는, 세계에서 거의 가장 심한 형태의 기억상실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1938년 영국에서 태어나 꽤 알려진 지휘자이자 음악가로 커리어를 쌓던 그는 1985년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의사들은 그가 당시 유행하던 독감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후에 정밀검사를 통해 알려진 이유에 따르면 그는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드물게 뇌신경에 침투하여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고 그 결과로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기억과 그 이후의 기억이 더 이상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장/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기억은 어렸을 때의 단편적인 기억들과, 자신의 부인 데보라의 존재(와 그녀에 대한 감정),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법 등에 불과하다. 요양시설에 살고 있는 그를 부인인 데보라가 찾아갈 때마다 그는 사람을 처음 본다며 반가워하고, 감격에 겨운 포옹과 키스를 한 다음 잠깐 얘기를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같은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클라이브와 데보라 웨어링. image from  the documentary: The Man With The Seven Second Memory>

그는 기억 상실 이후 계속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기록은 좌절과 분노의 기록이기도 하다. 상단 글 제목 뒤에 이미지로 삽입된 기록과 아래 이미지는 그의 일기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그가 일기장에 현재 시각을 적고 자신이 깨어있다고 쓰는 순간, 그 '현재'는 지나가버리고 그에게 그 기억은 다시 증발해 버리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어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계속 반복해서 같은 내용을 다시 써야 한다. 그에게 삶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그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도, 깨어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스스로 인지하기 어려운 삶. 그에게는 매 순간이 이유를 알 수 없이 무섭고도, 슬프고도, 당황스러운 순간의 연속이다. 한편, 그와는 떨어져 지내면서 한 때 그를 잊고 새 출발을 하려고 노력하다 다시 돌아온 부인 데보라나, 전처에게서 얻은 그의 자식들에게도, 자신들의 어떤 변화도 기억하지 못하고 똑같은 질문을 매번 반복하는 클라이브의 이러한 모습은 비록 살아있지만 매번 그의 빈 껍데기와 얘기하는 것처럼 공허하고도 슬픈 경험일 것이다.  


<클라이브 웨어링의 일기 내용 중 일부>


그렇다면 클라이브는 뇌의 어떤 부분의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러한 증상이 생기게 된 것일까. 그리고 기억이란 어떤 형태로 저장되기에 클라이브는 자신이 겪었던 많은 경험은 잊어버리고도 음악 연주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나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라고 불릴 수 있을까? 기억과 망각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다소 철학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수히 떠오르는 많은 질문을 살짝 뒤로하고 우리는 일단 우리가 현대 과학을 통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집중해보기로 하자. 그 시작은 뇌에서 기억이 어떻게 저장되는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편에서 우선 뇌에서 기억을 다루는 영역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화에 계속)


참고자료:

The Man With The Seven Second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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