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애를 8년 동안 했다고 하면 다들 눈이 평소보다 1.8배는 커진 채 질문하는 말이 있다.
1) 헤어진적 한 번도 없어요?
2) 헐 싸운 적 없어요?
3) 8년이요? 와 대박. 어떻게 그렇게 오래 만나요?
이 정도?
권태기도 없었고 헤어진적도 없다고 말하면 1.8배는 모자라다는 듯 2배까지 눈이 확대되면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초롱초롱한 눈빛 발사를 보내서 음,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그런 기가 막힌 비법을 알려주고 싶은데 사실 다들 알고 있는 뻔한 말만 나온다.
“성향이 잘 맞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가 장착되어 있어서…”
아니나 다를까 이런 말을 하면 다들 표정이 건조해져서 괜히 나도 머쓱해지곤 했는데 매 해 지날수록 우리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잘 지내는 이유에는 저 말만큼 정확한 말이 없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 만나 잘 지내는 데에는 비슷한 것을 지향하는 성향과 배려 이 두 가지가 건강한 관계를 확장시키는데 좋은 역할을 해준다.
그러다 보니 22살 때부터 만나 연애 8년 차에 접어들기 시작할 때 결혼에 대한 말이 나오기 시작한 건 20대에서 30대로 접어드는 것만큼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진짜 바쁘고 정신없을 거라는 소문들이 무색할 만큼 우리는 서로 취향이 비슷한 탓에 그 과정들이 소란스럽지 않게 진행되었다.
웨딩 플래너는 제외
-> 불필요한 개입이라고 느껴져서 웨딩 플래너 없이 편안하게 준비했다.
결혼식은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는 비수기에
-> 12월로 결정
다른 예식 손님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게 하우스 웨딩으로 -> 예약 성공
우리는 여행을 좋아하니 웨딩스냅은 해외에서
-> 우리가 낼 수 있는 스케줄에서 가장 시간이 합리적인 보라카이로 예약 완료. 실제로 zara에서 산 원피스를 입고 선크림만 바른 채 웨딩스냅을 찍고 왔다.
그야말로 일사천리. 큰 틀을 잡아두고 매달 하나씩 해야 할 일들을 클리어할 때마다 그 쾌감은 슈퍼마리오가 머리 위에 있는 벽돌을 툭- 쳐서 떨어지는 버섯을 먹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이 날은 우리의 상반기 계획 중 하나, 예약한 식장에서 음식을 테이스팅 하는 날이자 겸사겸사 어머님과 두 번째 식사자리를 갖는 날이었다.
우리가 결혼식을 한 이태원의 한 식장은 전반적인 분위기나 스타일링 그리고 하객들에게 대접할 음식까지 직접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곳이었고, 그야말로 신랑 신부의 취향에 맞게 커스터마이징을 할 수 있어서 그 매력에 바로 예약했다. 하지만 어머님은 우리의 결혼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이 말투와 표정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너네는 너무 뭐든 빨리해.”
“무슨 벌써 결혼식장을 정해.”
“내년에 결혼하면 되지. 올해 꼭 결혼하려고?”
오, 8년을 만나고 들어야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잘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 할 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도 예약한 식장을 가는 길에 할 말은 더더욱 아닌 것 같고. 하여튼 내 머리에서는 떠오르기 어려운 말이었다.
이 때는 4월. 우리 결혼식은 12월. 결혼식장을 빨리 예약해서 우리가 손해 볼게 무엇이 있을까? 빨리 예약함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날짜를 선점할 수 있고, 금전적인 부분에서도 할인률이 더 들어간다. 그렇게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렇게 느리지도 않게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들뜬 마음으로 결혼식장 장소로 가는 차 안에서 어린애에게 괜히 핀잔을 주듯이 말씀하셨다.
그때 미처 몰랐지만 점차 알게 된 점은 우리의 행동 어느 부분이 탐탁지 않을 때 불편한 마음을 삼키는 편이 아니라 핀잔을 주는 편이었다. 귀담아듣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 핀잔에는 ‘내 생각이 맞고 너네는 틀려’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채로 말씀하실 때가 빈번해서 나는 그럴 때마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마음의 벽을 또 한층 쌓아 올리게 된다.
찝찝한 말을 듣고 도착한 결혼식장. 하우스 웨딩답게 건물 전체가 우리 결혼식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프라이빗해서 방해받지 않는 결혼식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님은 오늘 처음 둘러보는 거라 기쁜 마음에 “ 어머님 여기 너무 예쁘죠”라고 신나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는데 심드렁한 표정과 돌아온 답변은 정말이지 오늘의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결혼식이 밥만 맛있으면 되지 뭐.”
자, 대충 대화할 때 어떤 스타일인지 느낌이 팍 오죠?
어머님의 기분이 좋지 않으실 때는 매번 저런 식이다. 우리가 하는 말에 같이 호응하면 어른스럽지 않다고 느끼시는지 아니면 상대의 말을 툭툭 쳐버리는 게 마치 어른의 미덕인 줄 아시는 그런 스타일. 대화하다 보면 내가 뭐 하러 말을 이어가야 하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서 어느 순간부터 사소한 말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순간들이 많이 왔다.
이 날도 마찬가지다. 그래 뭐 결혼식이 밥이면 되지. 틀린 말은 아닌데 즐겁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사람 무안하게 그런 식으로 대답할 일인가. 어머님은 탐탁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자 하셨겠지만 오히려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게 나의 말에 찬물을 싸악- 끼얹으시고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준비된 식사를 시작했다. 결혼식날에 어떤 음식으로 할지 하나씩 맛보면서 큰 주제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지막 음식까지 테이스팅을 마치고 나가기 전, 남편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어머님이 갑자기 뭔가 말하고 싶다는 표정을 하시면서 친오빠에 대한 것을 물어봤다.
“오빠가 청와대 다닌다고?”
“네. 벌써 진급도 하고 잘 다니고 있더라고요”
“오빠 그럼 지금 A대통령이랑 같이 일하고 있겠네?”
“네. 맞아요”
“근데 난 A대통령 싫어하는데.”
‘오, 이 말은 또 뭐지? 아무것도 아닌 척 웃으면서 이렇게 정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그리고 어머님이 어떤 대통령을 좋아하고 싫어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마치 자신의 정치성향을 알아달라고 하는 듯해서 나는 둔한 표정을 지으며 그 의도를 못 알아듣는 척했다.
“오빠는 그냥 직업이죠 뭐.”
지나고 보니 이런 대화는 남편이 없을 때 이루어졌고, 남편이 등장하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가만히 계셨다.
솔직히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결혼식장에서 일정을 마치고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벌어졌다.
어머님은 백화점에 들렀다가 댁에 들어가신다고 하셔서 명동 근처로 향하고 있었다. 주말이라서 차도 꽤 밀렸다. 느리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정적을 깬 건 어머님 이셨다.
“기독교라고 했지? 개종하는 거 생각해 봐.”
그렇다. 나는 기독교이고 우리 집도 기독교. 어머님은 불교, 남편은 종교에 관심이 없어서 무교로 살아왔다.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네?라고 말이 튀어나왔고, 내 옆에서 운전 중이던 남편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엄마 지금 뭐라고 했어? 개종을 하라고?”
“결혼하면 개종해야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얘가 개종을 왜 해.”
“원래 결혼하면 남자 쪽 종교 따르는 거야.”
“아,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뭐가 말이 안 돼.”
어머님은 본인의 말만 정답이고, 그에 반하는 말을 흡수하지 않으셨다. 만남을 가질수록 대화가 대화로 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우리는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 날 어머님은 내리는 순간에도 이렇게 말씀하였다.
“알겠지? 개종하는 거 생각해봐 봐.”
말의 농도가 완벽히 궤도를 넘어가면 사실 화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를 면밀히 파악하게 된다. 단 한마디로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어떤 말은 꽤 강력해서 고맙게도 한 번에 상대를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어머님은 누구보다 대문자 K-시어머니가 되고 싶으신 듯 말도 안 되는 말로 나를 제압하려고 했고, 그렇게 하면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러니 본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며느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들어오는 며느리.
그렇다. 나는 고작 두 번째 만남의 자리에서 명령조로 개종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교가 맞아야 마음이 맞는다고. 자기 주변 종교가 다른 집들은 다 이혼했다고. 나중에 우리 아이가 교회에 가는 게 싫다고.
어머님은 시어머니라는 이유로 울타리 쳐 놓은 내 삶에 허락 없이 한쪽 발을 넣으려고 하셨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시어머니라는 존재는 그래도 된다고 인식하시고 계신 것이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냐고요?
남편과 어머님은 며칠 동안 종교에 관해서 언성을 높여갔고 결국 “불교 믿는 사람 만났으면 좋잖아...”라고 말하며 체념하셨다. 지금까지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나타났을 때 남편은 자신의 엄마에게 얼마나 큰 말실수를 해왔는지 알려주기 위해 저 날의 예시를 언급한다.
그럼 대부분 “참 나”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ps. 우리는 최근에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이곳에서 새로운 교회를 다닐 예정이다. 기독교인 친정 엄마는 불교인 시어머니(즉, 나의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는 말을 안 하고 일요일에 다른 일정이 있다고 대충 둘러댔다. 난 어머님께 일요일에 교회를 간다는 일을 숨기지 않을 예정이다. 숨길 이유가 단 한 개도 없으니까. 아멘.
남편의 talk
우리 외국 가서 살자… 장모님께서 사과를 배라고 하시면 동의하면서 살 자신 있는데 우리 엄니가 저렇게 대화가 안 되니까 너무 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