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할 때, 당연히 나는 나이 때문에 아주 많이 힘들었다. 일단은 마흔이 넘어가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나를 익히려면 세 번, 네 번을 들여다보아야 했고, 새로운 내용을 암기하는 데는 젊은 수험생들의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남들은 이제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그 '나이'에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간호 학원을 거쳐서 동네 내과 병원에 입사했을 때, 나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제일 어린 직원은 스물일곱이었다. 공부하다가 일시적 경단녀가 되었던 나에게 그곳은 첫 직장이었고 나는 말 그대로 늙은 신입이었다.
그리고 다들 잘 알고 있듯이, 병원이라는 곳에는 태움이 존재한다. 나이도 많고 병원 경험도 없는 어리숙한 늙은 신입이라고 예외는 없다. 아니, 오히려 더 가혹한 갈굼이 시작되었다.
나를 괴롭힌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 다른 한 명은 가장 나이가 어린 스물일곱 살 직원이었다. 나이가 주는 이점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경험에서 오는 통찰이다. 둘은 동시에 나를 괴롭혔지만 그 이유는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 많은 직원이 나를 괴롭혔던 이유는, 나를 질투했기 때문이다. 이십 년 동안이나 이 바닥에서 굴러 먹었다는 그는, 아주 닳고 닳은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뉴페이스인 나는, 일을 배우려는 열정이 있었고 아직은 순수했다. 환자들이나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려는 나를 그가 꼴 보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질투에서 비롯된 태움이라는 알게 되자, 오히려 그가 조금 안타까워졌다.
그러나 젊은 직원에게 당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내가 병원 컴퓨터 프로그램을 익히는 데 조금 느려지거나 사람들이 빠르게 전하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서 되물을 때, 그는 나를 향해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보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나라는 존재도 싫지만, 그보다는 마흔일곱이라는 내 '나이'를 더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그렇게 판단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행동은 너무나 이중적이었다. 그는 지각을 밥 먹듯이 한다거나 힘든 일은 핑계를 대면서 쏙 빠지는 등 본인을 비롯한 젊은 직원들의 행동은 태연하고 무심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들처럼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 않는 내가, " 이거 이렇게 하는 것 맞나요?"라고 질문을 하면, 갑자기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면서 한숨을 쉬고 뜸을 들이면서 생색내듯이 일을 가르쳐 주었다. 나이 많은 사람의 특성을 보이는 그 순간에 그는 가장 냉담했다.
어린 선임에게 갈굼 당하는 기분은 정말 말로 못 할 고통이다. 그러나 견뎌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가 많아도 신입이기 때문이다. 재취업을 하려는 중년들이 그 바닥에 터를 다지려면 무조건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겪으면서 나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공부할 때 머리가 느리게 돌아갔던 것처럼, 아무리 사회경험이 그들보다 많고 어쩌구 해도 나이에서 오는 핸디캡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내 나이가 어때서, 나는 아직 충분히 젊은데,'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아마도 이곳에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젊은 니들보다 내가 못하는 게 뭐냐'라는 억울한 마음을 내려놓고 현실적으로 내가 젊은 그들보다 못하는 게 무엇인지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해 보았다. 그리고 변화 가능한 것은 빠른 노력으로 커버를 치고, 아무리 해도 잘 안되는 것도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는 노력으로 극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스타벅스 중장년층 리스타트 프로그램(출처:이데일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자만하는 순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모르겠다. 사랑할 때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지도. 그러나 젊은 사람들과 협업해야 하다면 그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자신의 나이에서 오는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자신을 나이보다 젊다고 지나치게 긍정하다 보면 정말 나잇값을 못 하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