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아카이브_ 동해
머물고 싶은 이방인,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낯선 곳의 주민 몇 사람이 모였다. #마을재생 #문화기획자 #지역문화의 현실을 키워드로 술상을 폈다.
한국 사회에서 술자리는 유흥을 뛰어넘는 중요한 사회적 공간이다. 비즈니스 논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고, 인생의 변곡점이 다뤄지는 곳이기도 하며, 때로는 사람의 진심이 드러나는 무대가 된다. 특히 문화기획자들에게 술상은 또 다른 ‘작업실’이다. 어쩌면 기획의 시작과 끝은 이런 자리에서 더 선명해지는지도 모른다.
지난밤, 우리는 문화와 관계의 접점을 고민하는 깊은 대화를 나눴다. 술기운을 빌려 솔직한 이야기가 오갔고, 그 안에서 기획자로서의 고민과 지역 사회 속 문화의 가능성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때로는 뜨거운 토론이, 때로는 인간적인 감정이 스며들었던 그 밤을 되짚어보며, 술잔 속에 담긴 문화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
기존의 북 콘서트는 작가가 강연을 하고, 청중은 듣기만 하는 일방적 구조였다. 그러나 이번 논의에서 제기된 방향은 전혀 달랐다. 청중이 창작자로 변할 수 있도록 기획하는 방식. 예를 들어, 주인공 몇 사람이 무대를 장악하는 방식에서 가족을 대상으로 모집을 하고 바닷가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글을 쓰고, 그 글을 서로 낭독하며 디지털로 기록해 누구나 창작의 경험을 공유하는 가족 참여형 북 페스티벌 프로그램이다.
이는 특정계층 문화 소비에서 벗어나, 관객이 직접 창작자가 되는 ‘경험 기반 문화 기획’의 사례다. 문화 행사는 더 이상 일반 전시나 공연이 아니라, 참여자가 주체적으로 개입하고 직접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 이는 AI가 콘텐츠 생산을 넘어서 창작의 도구로 활용되는 시대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문화 기획은 이제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창작과 소비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문화기획자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대상을 넘어서야 한다. 지역과 사람을 연결하는 브리지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늘 존재한다.
한 참석자는 지역에 정착하며 겪었던 외부인으로서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지역 사회가 그를 낯설게 바라보았고, “외지에서 온 사람이 우리 지역에서 뭘 하겠다고? “라는 묘한 경계를 느껴야 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역성(locality)과 외부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지역 문화기획자는 행사 기획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외부인의 조화를 설계하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지역 주민들이 외부인을 수용할 수 있도록 연결고리를 만들고, 기존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결국 문화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기획자는 지역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며, 오해를 줄이고 신뢰를 쌓는 데 주력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술자리는 관계 형성의 중요한 장치다. 취기가 아니라, 평소에는 쉽게 꺼낼 수 없는 진심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번 모임에서도 한 참석자는 “술자리는 일종의 심리적 해방구다. 직위나 역할을 떠나 서로의 인간적인 면을 확인하고, 때로는 잊고 있던 관계의 본질을 되찾는 과정이다. “라고 했다.
문화기획자로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계 형성의 장을 어떻게 문화적 맥락에서 활용할 것인가이다. 한국의 문화는 여전히 공동체 중심적이며, 인간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화 행사를 기획할 때도 이러한 요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좌석 배치 하나만으로도 관계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포럼처럼 일렬로 배치할 것인가, 아니면 원형으로 배치해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할 것인가? 관계를 형성하는 ‘맥락’을 기획하는 것이야말로 문화 기획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문화 기획은 아이디어가 전부가 아니다. 실행력이 없으면 좋은 기획도 공허한 구호에 그친다.
한 참석자는 “나는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자랑이 아니라, 문화 기획자에게 필수적인 철학이다. 좋은 기획이란 단순한 구상이 아니라, 끝까지 실행되고 유지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특히 지역 기반 문화 기획에서는 실행력과 지속성이 더욱 중요하다. 단기적인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회성 이벤트보다 지역과 연결된 문화적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기획자는 예술가이자 전략가이며, 동시에 실행가여야 한다. 실행력이 없는 기획은 공허한 이상론에 불과하다. 문화의 힘은 결국 지속성에서 나오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획자의 실천력이다.
이번 대화모임의 인사이트는 “문화기획자는 관계를 기획하고, 지역과 외부인을 연결하며, 지속 가능한 문화의 방향 설계”에 있다.
문화는 흔해 보이는 콘텐츠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지역 사회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공연을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고 연결되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까? 술잔 속에서 흩어진 이야기들이 문화의 새로운 길로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또다시 기획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