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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May 25. 2024

[에세이] 당신이 있어야 할 곳

달빛이 그들을 비추기를

 며칠 전이었다. 하늘에는 달이 가득 차올라서 구름에 둘러싸인 채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만월은 내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그래서 그것을 잠시 바라보았는데, 곁에 계시던 내 필명을 아시는 분이 장난스레 말하셨다. ‘너 지금 시월(視月)하고 있는 거야? 달 보고 있는 거지?’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네, 맞습니다’라고 말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통일외교 전공을 가진 분을 통해 한반도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유래가 없는 삼대 세습. 독재. 공포 정치. 총화. 인민재판. 공개 처형 등. 군필자라면 으레 들어본 내용들이었지만 그날따라 더욱 서글프게 들려온 것은 왜였을까.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냥 당연한 것처럼 여겼던 북한 인민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날 새롭게 느낀 것은, 그것이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원래부터 그런 건 없다는 이야기를 군대에서 자주 들었다. 그것은 일 년 육 개월을 국가에 헌납한 내가 얻은 몇 안 되는 진리 중 하나였다. 그렇듯 ‘북한이잖아’라는 말이나 ‘북한은 원래 그런 나라이니까’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옳지 못했다. 북한 인민들이 고통받는 것에는 결코 당위성이 없었다. 그 말인즉, 지금 내가 이곳에서 누리는 것, 예컨대 자유롭게 정치적 발언을 하고 해외의 문화를 접하고 종교 생활을 펼칠 수 있는 것 역시도 충분한 당위성 없는 은혜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그것을 자각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같은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이었음에도… ‘저 땅에는 행복이 없다.’라는 명제를 절대화한 나 자신에게 욕지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답답함에 한숨을 내쉰 나는 발표자의 말에 다시 집중했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북한 인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탈북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유적 표현이라거나 수사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 위험하고 어둡고 컴컴한 길을 헤치고 헤쳐 끔찍한 그 땅을 벗어나려 애쓰고 있다고 했다. 내 머릿속에는 그들이 탈북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들은 북한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고향에 남겨두고 온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아들, 딸을 두고 눈물을 삼키며 탈북할 것이다. 겨우 국경을 넘더라도, 그들을 북으로 되돌리려 하는 중국 공안들을 피해 몸을 숨길 것이다. 몇몇은 브로커에게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성매매를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탈북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한 상상을 한 나는 손발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도 없으리라. 다만 오늘 하늘에 차오른 만월의 달빛은 그들이 가는 길을 비추어 주지 않을까. 순간 나는 약 삼십 분 전, 밤하늘에 떴던 희끄무레한 보름달을 떠올렸다. 내가 그 달을 보며 우수에 젖어들고 내 지인이 그 달을 보며 장난을 치던 그 순간에도, 탈북을 위해 목숨을 건 그들에게는 저 달이 생존을 위한 길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자 아까 나를 덮쳤던 부끄러움은 다시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부끄러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면, 저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어야만 했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고 그 은혜를 나누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내 위치와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무력감에 휩싸이게 했다. 아니, 그래도 기도만큼은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력함을 느끼며 두 손을 모았다. 만약 신이 있다면 저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느껴지는 기도의 중압감은 어마어마했다. 감히 내가 저들의 심정을 알 수 없고, 저들이 겪는 공포를 나는 느끼지 못하였으며, 저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내가 살지 않았기에, 그들의 영혼에 평안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는 두렵고 떨림 속에서 이어졌다. 실제로 내 온몸은 떨렸고 내 영혼은 두려웠다. 그렇지만 기도를 멈출 수는 없었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고,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행복과 환희가 가득한 이 땅이 아닌, 죽을 것을 각오하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저들의 곁이라고 말하며 기도했다. 비록 나는 그들 곁에서 함께 슬퍼하지는 못하지만, 당신만큼은 저들 곁에서 함께 눈물 흘리며 슬픔을 나누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서 달을 보는 나보다 저들이 더 밝고 환한 달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지 알 수 없지만, 그날 다시 밖으로 나와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왠지 더 밝아진 만월이 빛을 발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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