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리 Nov 10. 2023

선량한 차별주의자

written by 김지혜




나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차별을 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


결정장애라는 단어에도 차별이 담겨 있다는 첫 부분을 읽고 '뭘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솔직히 들었다. 책을 읽으며 용어를 가려 쓰는 게 불편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하성 표현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때로 사회는 단어를 교체한다. ‘장애자’나 ‘불구’를 ‘장애인’으로, ‘결손가족’을 ‘한부모가족’이나 ‘조손가족’으로, ‘혼혈인’을 ‘다문화가족 자녀’로 순화하는 식이다. 이런 단어의 교체로 낙인이 온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장애인’ ‘다문화’ 등의 용어가 다시 낙인을 담은 비하성 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단어를 바꾸어도 그 세상을 비하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은 한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 P94


나를 돌아보았다. 한때 자폐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내 아이는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았지만, 이제는 사라진 진단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일부러 사용했다. 자폐는 그 자체로 불행의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 장애인 중 가장 소외받는 발달장애 중 하나. 아이를 키우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극단적으로 자폐적 성향이 100%인 사람과 0%인 사람들을 일렬로 나열했을 때, 과연 어디서부터 자폐 진단을 받을지 모호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폐적 성향을 갖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강박적 성향을 갖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한 가지에 극도로 몰입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게 내 결론이었다. 그래서 자폐라는 단어를 말하는 데 조금 자유로워졌다. 긍정과 부정, 강점과 약점, 모든 의미를 갖고 있는 추상처럼 여겨졌다. 어떤 면에서 자폐는 그냥 자폐가 되었다. 개인적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그런데도 여전히 타인이 자폐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움찔했다. 변화를 싫어하고 일정한 루틴을 따라야 편안함을 느낀다는 누군가가 “어쩌면 저도 자폐인지도 모르죠.”라는 말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였다. 불쾌하거나 불편하기보다는 ‘당신은 자폐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라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자폐 진단을 받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을 아느냐?"는 울분 같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자폐를 말해도 괜찮고, 다른 사람은 자폐를 말하면 안 되는 모순적인 상황에 어질했다.  


이 즈음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을 읽었다.


2011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10억 명이 장애를 갖고 살아간다. (중략) 이 보고서에서 말하는 장애에는 운동장애, 감각장애, 정신질환, 인지 및 발달장애, 일반적인 노화가 포함된다. (중략) 이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한데 묶였다. 즉 정상성은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압도적으로 지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보고서의 숫자들은 장애가 내적 또는 외적 원인에 의한 일상적인 경험이자 무한히 다양하고, 창의성과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어디를 가든 사회적 위험성을 안고 있는 우리 삶의 보편적인 한 부분임을 암시한다. P30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에 등장한, 신장 120cm 남짓의 왜소증을 가진 여성 어멘다는 스스로를 장애인이라고 말했다. 장애인이란 말은 어멘다를 낮잡아하는 말이 아니라, 어멘다를 장애인으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노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여러 능력을 잃어간다. 시력, 청력을 잃을 뿐 아니라 거동이 불편해지고 인지적 판단력도 흐려진다. 책에서는 이를 취약성이라고 말했다. 정확하게 “모두에게 닥칠 부적합 상태로 인해 삶에 찾아올 위험 부담을 표현적으로 공유한다는 뜻”이다.  


나는 취약성을 공유하는 것이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라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을 가진 다수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소수를 구분해야 한다. 나는 이성애자로서 성소수자를 만났을 때, 나는 한국인으로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났을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구분은 무수히 많다. 나는 수도권 출신으로서 지방 출신을 생각해야 하고,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구분 자체가 차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 스스로가 취약성을 가진 인간임을 인지해야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마지막 문장에 답이 있다.


‘우리’라는 말은 ‘그들’을 전제로 할 때 배타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혹시, 하나의 폐쇄된 집단으로서의 ‘우리들’이 아닌, 수많은 우리’들’이 교차하고 만나는 연대의 관계로서, ‘우리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누군가 막무가내로 다가가 “금을 밟았다”며 “나가!”라고 외치지 않는, 환대하고 함께하는 열린 공동체로서 ‘우리들’을 만들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회성이 어려운 내 아이, 혹시 2e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