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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리 Apr 12. 2024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written by 김현아



 

양극성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딸, 그 삶을 바라보는 엄마의 이야기.


의사 부모 밑에서 특별한 문제없이 유소년기를 보낸 딸은 고등학교에서 실시한 우울 검사에서 우울 척도와 자살 척도가 높다는 결과를 받은 것만 빼고는 학교에서도 잘 지내고 친구도 많은 평범한 아이였다. 수능을 며칠 앞두고 학교에 무단 결석하며 소란을 피우기는 했지만, 수능을 본 뒤 재수를 했고 대학에도 합격했다. 딸은 스스로의 요구로 독립하여 살던 어느 날부터 자해를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양극성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는다. 이후 7년간 여러 번의 자해와 자살 시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이 책은 작가의 둘째 딸 ‘안나’가 위태롭게 삶을 이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에서 정신질환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가족으로서 고백한다. 또한 정신건강의학이 과학적인 접근과는 거리가 있는 방법론으로 연구하며 사용하는 약물 또한 모호한 척도로 공인된다는 점을 의사로서 지적한다. 환자의 진단도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잦고, 사용하는 약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그런 약물 치료를 통해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앨런 프랜시스는 저서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에서 지난 15년간 소아 양극성 장애는 40배, 자폐증은 20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는 3배로 늘어난 ‘진단 인플레이션’ 현상을 지적하면서 DSM이 새로운 장애를 포함할 때마다 수천만명의 새로운 환자가 생길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 이면에서 움직이는 위험한 손, 제약회사들에 대한 경보도 울리고 있는데 한 예로 20년 사이에 항우울제 사용이 4배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P257-258


딸은 처음에는 양극성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았지만, 이후 작가는 양극성 스펙트럼 장애보다는 경계성 인격장애에 딸이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울증과 조증이 동반하는 양극성 장애는 우울감이 지속되거나 흥미가 저하되는 증상뿐만 아니라, 과민한 기분, 고양된 에너지, 과장된 자존심, 주의 산만 등의 조증 삽화(증상이 존재하는 시기, 증상이 없는 시기와 뚜렷하게 구분)가 한 번이라도 있을 때 진단한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우울감과 무력감은 물론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과 이를 자살 혹은 자해로 반응하는 행동적 특징을 갖는다.


작가는 딸이 복용하는 약물 중 일부를 임의로 중단시키기도 한다. 약을 먹어도 상태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단약을 통해 극도의 무력함을 호소하는 현상은 사라졌다. 그렇게 아이에게 맞는, 어떤 면에서는 최소한의 부작용을 가진 약을 찾는 데만 5년이 걸렸다. 일부 약물을 중단하며 아이에게 맞는 약을 찾아가는 과정은 아마도 작가가 내과 의사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의학적 지식에 전무한 사람들의 경우 현실적으로 힘들다.


나는 내과 의사이기 때문에 환자에게 처방을 하기 전 엄정한 임상시험으로 효과와 부작용이 입증된 약인지를 꼼꼼하게 따지고 조금이라도 효능 대비 부작용이 심한 약제를 사용하는 것에는 매우 신중하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에서 쓰이는 약제들은 그런 근거를 확보하지 못한 것들이 많은데, 이는 우리가 다른 신체 질환에 비해 아직 잘 모르는 뇌라는 기관에서 일어나는 질환들에 사용되는 약제인 만큼 확증된 근거를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처방되는 정신건강의학 약제들의 상당수는 내과 질환의 치료제들에 비해 근거 수준이 미약한 약들이다. P189  


작가는 딸의 투병기를 곁에서 지켜보며 사회적 약자, 소외된 자, 소수자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또한 정신장애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무엇이 질병이고 무엇이 질병이 아닌지 고민하다, 어떤 사고, 학습, 행동 방식만이 옳고 그 외의 것은 장애라고 규정하는 신경 다양성 운동까지 이른다. 이 지점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 비언어성 학습장애, 사회적 의사소통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작가의 또 다른 딸이 비언어성 학습장애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비언어적 학습장애와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질적인 차이보다는 양적인 차이로 구분한다. 비언어적 학습장애는 인구 3~4 퍼센트에서 존재하는 비교적 흔한 장애로, 사회적 의사소통장애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상당 부분 중복된다. 비언어적 학습장애를 가진 딸의 경우, 의사인 부모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증상이 경미하여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 뿐이다. 경미한 수준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전혀 보호받지 못한다. 사회적 눈치가 없거나 일머리가 없다고 놀림받을 뿐이다. 게다가 경쟁과 성장만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스트레스와 우울, 고통과 무기력,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세운다.


작가는 정신 질환에 영향을 주는 요소 중 하나로 소셜미디어에 주목하는데, SNS 사용 빈도가 높을수록 정서적 지지가 낮을수록 정신 건강 위험군 비율이 높아진다. 특히 SNS 영향은 남성보다도 여성에게 더 강하게 작용한다. 작가가 제시한, 양극성 장애 자녀와 대화하는 방법도 상대의 걱정과 공포를 이해하고 다독여주고, 아이의 말을 듣고 또 들으며, 함부로 화를 내지 않는 등 넓은 의미에서 정서적 지지에 기반을 둔다.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몇 가지 노력은 할 수 있다. 아마도 작가가 책을 낸 이유기도 하겠지.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노력과 인내, 그리고 회복 탄력성, 그 밖에도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장애’가 아닌 ‘차이’를 인정하자는 신경 다양성 운동이 생겨난 것처럼 말이다. 작가가 제안하는 두 가지는 ‘미쳤다’고 말하는 대신 ‘아프다’고 말하는 것. ‘정신질환’이란 단어 대신 ‘뇌질환’이라고 바꾸는 것. 다른 신체질환처럼 뇌질환도 의지와 성격의 문제가 아님을 인지하는 것.




우리는 정신질환이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아도 우리를 찾는
수많은 병들과 별반 다르지 않고,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P75




※ 이 책에 등장한, 양극성 장애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명 인물

빈센트 반 고흐(화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작가), 비비언 리(배우), 안젤리나 졸리(배우), 지미 핸드릭스(가수), 커트 코베인(가수), 버지니아 울프(작가), 윈스턴 처칠(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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