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사이먼 배런코언
고도로 체계화하는 성향의
원인 유전자 중 일부와
자폐의 원인 유전자 중 일부는
동일한 유전자다. P129
자폐는 어떻게 인류의 진보를 이끌었나. 소제목부터 강렬하다. 엉뚱하고 쓸모없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자폐가 인류의 진보를 이끈 주체였다는 사실(어쩌면 가정)은 기존의 통념을 완벽하게 부서버린다.
이 책은 굵직하게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체계화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 그리고 체계화 메커니즘과 자폐의 상관관계다. 결론만 정리하면,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 달리 이토록 발달한 이유는 '만일-그리고-그렇다면'으로 사고하는 체계화 메커니즘 때문이다. 질문하고 가설을 수립하고 시험 및 확인하고 다시 변형하는 과정.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생각, 감정, 의도, 욕망)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감 회로도 중요하지만, 체계화적 사고야말로 발명을 비롯해 농업, 수학과 과학, 음악, 공학과 기술, 예술과 공예, 법률, 스포츠 등 인류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 같은 체계화 능력은 자폐를 일으키는 유전자 중 일부와 동일하다.
작가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체계화와 공감 능력 두 가지를 바탕으로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체계화와 공감 능력이 고르게 발달한 집단은 인구의 1/3 정도, 체계화 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집단과 공감 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집단이 각각 1/3을 차지한다. 마지막으로 공감 능력이 뛰어나지만 체계화 능력은 평균 미만이거나, 공감 능력은 낮지만 체계화 능력은 우수한 집단이 나머지다. 작가는 체계화 능력은 고도로 발달했지만 공감 능력은 부족한 사람들을 패턴 시커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이 자폐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특정한 패턴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에서 어려움을 보이지만 일정한 패턴을 가진 수학적, 과학적 세계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
다양한 분야에서 고도로 체계화를 추구한 사람들은 종종 자폐인이라고 생각된다. 예술에서는 앤디 워홀, 철학에서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학에서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물리학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헨리 캐번디시가 자폐인으로 알려져 있다. P164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도로 체계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폐인인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인지(정보를 처리하는 방식)라는 면에서든, 유전과 출생 전 성호르몬이라는 면(원인적 인자의 극히 일부로서)에서든 단순히 겹칠 뿐 동의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도로 체계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뛰어난 발명가나 음악가나 운동선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경향이 있다면 뭔가를 발명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P165
이 세상에는 돌아가는 세탁기나 자동차 바퀴를 바라보거나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자동차를 일렬로 세우는 등의 행동 반복하는 자폐인도 분명 존재한다. 통념상 이들이 아마 자폐인의 상당수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세부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적인 그림을 읽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더불어 체계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행동은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라 수많은 실험을 통해 패턴을 찾으려는 탐색의 일환일 수도 있다. 물론 일부 자폐인들은 뇌전증, 심한 불안, 중증 학습 장애, 거의 말을 못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이는 자폐의 핵심적인 특징이 아닌 자폐가 갖고 있는 여러 증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든 자폐인에게 고루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폐가 고도로 체계화하는 능력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해서, 자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변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에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대부분인 MIT 대학교의 경우, 졸업생을 중심으로 자폐 자녀를 가진 비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동문이 결혼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여 자녀들의 자폐 발생률을 비교하는 연구였는데, MIT 총장은 이 연구를 승인하지 않았다. 만약 가설이 확인된다면 MIT의 명성이 손상될 우려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MIT 연구는 중단되었지만 실리콘 밸리에서 자폐 발생률이 높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실리콘밸리라 할 수 있는 아인트호벤에서도 자폐 발생률이 높다고 한다. 체계화 능력이 발달한 사람들이 실리콘밸리와 같은 특정 장소에 모이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이들이 만나 결혼할 확률도 높아지고 자연스럽게 자폐 자녀를 가질 가능성도 올라간다.
우리는 STEM에 재능을 지닌 사람은 일반 인구에 비해 자폐인 자녀를 둘 가능성이 더 크며, 그런 사람이 모여 사는 지역사회에서는 자폐 유병률이 크게 높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중략) 만일 그렇다면 (물론 다른 많은 요소가 함께 작용하겠지만) 디지털 시대 들어 자폐 발생률이 기하급수적을 증가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었다. P269
이쯤에서 책은 신경당양성을 이야기한다. 뇌는 한 방향으로 발달하지 않는다. 공감에 특화된 사람이 있는 반면 체계화에 특화된 사람이 존재한다. 자폐는 고도로 체계화하는 성향과 관련이 있으며, 이런 성향은 강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장애와 관련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지적 공감에 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높은 자폐인들을 위한 다양한 중재 방법이 필요하다. 가령 당사자가 편안함을 느끼는 환경을 조성하여, 스스로 놀이를 즐기며 또래와 관계를 맺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뇌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그 덕에 인간의 신경다양성이 풍부해진다. 지적 장애가 없으며 고도로 체계화하는 자폐인의 마음은 오랜 세월 진화를 거쳐 온 자연적 뇌 유형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자폐인, 그리고 자폐 진단을 받지 않았지만 고도로 체계화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유형의 뇌 중에 하나에 해당할 뿐이다. 이들의 뇌 잠재력을 활짝 꽃 피울지 고통 속에서 살아갈지는 이들이 어떤 환경에 놓이는지에 달려 있다. P278
일부 학자는 자폐에서 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까지, 난독증에서 통합 운동 장애까지 다양한 장애를 고려하면, 인구의 최대 25퍼센트가 신경다양성 범주에 들어간다고 추정한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신경다양성이란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P280
마지막으로 진단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적어본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이다.
내 생각에 살아 있든, 세상을 떠났든 누군가 자폐인일지 모른다고 추정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단이란 자신에게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기가 매우 어려워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할 때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인물에 관한 파편적인 정보를 근거로 누군가를 진단한다는 것은 신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비윤리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진단이란 언제나 당사자의 동의를 기반으로, 당사자에 의해 시작되어야 한다. P165
고도로 체계화하는 성향이 있다고 해서 항상 자폐 진단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일상적인 기능이 원활하지 못해 학교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 때만 자폐 진단을 받으면 충분하다.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부모나 파트너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진단이 꼭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중략) 진단은 자폐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내려져야 한다. P298
PS.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의문은 들었다. 나의 경우 체계화 지수와 공감 지수 평가에 의하면, 두 지수 간 큰 차이가 없는 B(balanced)형이었는데, 체계화 지수가 높은 S(systemizing)형과 공감 지수가 높은 E(empathizing),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이들이 갖고 있는 능력의 총합은 다르지 않을까? 예를 들어 능력의 총합이 10이고 그중 공감 지수와 체계화 지수 모두 5를 가진 사람과, 능력의 총합이 100이고 이중 공감 지수가 5, 체계화 지수가 95인 사람 간 차이 말이다.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절대적 수치가가 아닌 상대적 비율만 고려했기 때문이다. 능력에 대해 절대적 수치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