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태석 Jun 26. 2022

난 서기가 싫다오

2년 연속 학급 서기를 한 사연

며칠 전, 양에게 연락이 왔다. 오래간만에 밥을 한 끼 하자는. 지금도 동네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는 양은 나와 같은 초, 중, 고를 나왔다. 그는 여전히 국민학교 또는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다양하게 연락을 하고, 이렇게 연락이 오면 보통 몇 명이 같이 만나게 된다. 주로 나와 친한 손과 임, 그리고 다른 몇몇 친구들. 개중에 나와는 별로 안면이 없었던 이도 있지만 몇 번인가 만나다 보면 그냥 다 친구다. 같은 동네에서 오래 살아서일까.


양의 연락을 받고, 문득 중학교 때 생각이 났다. 양과 나는 중 2 때 같은 반이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반장을 도맡아 해왔던 양은 2학년 때도 부반장이었다. 반면 나는 반장, 부반장이나 이런 임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콕 집어 서기를 맡겼다. 후에 알고 보니,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내 이야기를 듣고 관심이 생겨 서기를 시켰다고 한다. (참고로 중1, 중2 때 담임 선생님들은 두 분 모두 체육 선생님이어서, 한 공간에 있다 보니 정보 공유를 많이 하셨다고 한다.)


학급 서기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아침에 등교하면 교무실에 가서 학급일지와 출석부를 교실로 가져온다. 출석부는 교탁 위에, 학급일지는 내가 가지고 있는다. 수업 시간에 어떤 단원의 진도를 나갔는지 기록했던 것 같다. 보통 반에서 글씨를 가장 잘 쓰는 학생이 서기를 하는데, 펜글씨 학원을 다녔어도 나아지지 않았던 내 필기체로 학급일지를 쓰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가장 힘든 과목은 역시 영어와 한문. 단원명이 어려운 한자면, 이건 쓰는 건지 그리는 건지 내가 봐도 분간이 힘들었다.


방과 후에 담임 선생님 종례가 끝나면, 출석부와 학급 일지에 담임 선생님 사인을 받아서 다시 교무실에 간다. 출석부는 제자리에 꽂아 놓고, 학급일지는 학년부장 선생님 자리 위에 올려놓고 오면 일과가 끝난다. 빠른 하교는 당연히 불가능할뿐더러, 아침저녁으로 교무실을 오가야 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이 되었다. 양과 나는 또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반장 선거 때 1등부터 5등까지 앞에 세워 놓으셨다. 그리고 반장 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손을 들었고, 그냥 그 친구를 반장 시키셨다. 1분도 안 걸려 끝났다. 부반장도 마찬가지. 그런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부반장 해봤던 사람을 물었다. 순진한 양이 손을 들었고, 양은 부반장이 되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지금부터. 학급 서기 해봤던 사람 손을 들라고 했고, 지난 1년간 서기를 하며 힘들었던 나는 모른 척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은 일단 임시로 양에게 서기 일도 맡기려고 했다. 그때, 양이 나를 가리키며 서기를 했었다고 공개 발언을 했다. 그렇게 나는 2년 연속 서기가 되었다.


고난의 1년이 다시 시작되었다. 업그레이드된 서기의 과중함은 담임 선생님의 은신술 덕분이기도 했다. 일주일에 종례를 안 들어오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학급 일지에 사인을 받아야 집에 갈 수 있었던 나는 담임 선생님을 찾아온 학교를 뒤지는 일이 잦았다. 때로는 교사 휴게실에, 때로는 컴퓨터실에. 심지어 전달 사항도 반장이 아닌 나를 통해 전달되는 일이 많았다.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지금도 학급 서기가 있을까? 이번에 양을 만나면 요새 학교는 어떤지 물어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와 우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