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신촌 세브란스 치과대학병원에 갔다. 젖니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던 시절. 어쩐 일인지 젖니가 빠지고 한참이 지나도록 영구치가 나지 않았다. 으레 나겠거니, 조금 있으면 나겠거니 한 기간이 오래되자 어머니께서 무척 다급해지셨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어금니도 아니고, 위쪽 앞니 하나가 그런 상황이라서 더 그러셨을 것 같다. (앞니가 제일 먼저 빠지는데, 다른 이들이 나는 동안에도 나지 않았다.)
동네 단골 치과를 가 보았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진단도 내릴 수 없었다. 큰 병원에 가보라는 동네 치과 선생님의 말에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무려 신촌 세브란스 치과를 데려가셨다. 당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이기도 했고(생각해보면 이때도 이대목동병원이 있었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치과로는 세브란스가 유명해서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치과의 풍경들. 소아치과였고, 열몇 개의 진료의자(정확한 명칭이 뭔지 모르겠다.)가 있었고, 각 의자마다 초록색 그물이 존재했다. 이 그물의 용도를 알겠는가? 그렇다. 아이들이 치료 중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놓는 역할을 한다. 나는 그래도 비교적 컸기 때문에 그물 속에 들어간 기억은 없지만 아주 어린아이들이 종종 그물 속에서 울며 치료받는 것을 보곤 했다.
너무 어릴 적 기억이라 내 진단명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했던 수술은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잇몸을 째고, 잇몸 속 깊이 존재하는 영구치에 조그마한 쇠 핀을 붙였다. 얼마나 아팠던지 무려 열 살인 나를 버스에 태워 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어머니는 그 큰 나를 업고 집에 가셨다. 치과 치료 후에는 차가운 걸 먹어야 한다며 그 당시에는 절대 사주지 않으셨던 떠먹는 아이스크림도 사주셨다.
교정기 비슷한 것을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시작했다. 교정기에 고리가 있어서 매일 고무줄로 영구치에 붙인 핀과 교정기를 연결해 장력으로 서서히 치아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짧으면 2주에 한 번, 길게는 한 달에 한 번 치과에 방문하여 검진을 받았다. 그렇게 근 일 년을 치과에 다닌 끝에 비로소 내 앞니 영구치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항상 어머니와 함께 다녔는데, 언젠가 한 번은 어머니가 일이 바쁘셔서 같이 가질 못했다. 대신 어머니가 일하시는 곳에서 일하는 누나 한 명과 같이 병원에 다녀왔던 기억이 있다. 왜 그 일을 기억하느냐면, 치과 진료가 끝나고 나를 현대백화점 옆 KFC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동네에 패스트푸드점이 없었기에 처음 가 본 패스트푸드점이 이곳이었기에,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이후에도 신촌에 갈 일이 있으면 종종 이곳에 들르곤 했다.
불혹의 나이를 몇 달 앞두고, 똑같은 윗 앞니 부근이 갑자기 아팠다. 혀로 누르면 통증이 제법 있었고, 잇몸과 윗 천장 사이 부분이라 동네 치과를 찾았다. (예전에 다녔던 치과는 이미 없어졌고, 다른 곳인데 이곳도 대학생 때부터 다녔으니 제법 오래 다녔다.) 우려스러웠던 대로, 지금은 나이가 지긋해지신 원장님께서 세브란스 치과 병원으로 가보라며 소견서를 써주셨다.
그날 바로 진료 예약을 하고 진료를 받을 2, 3주 동안 내 마음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다시 찾은 세브란스 치과 병원은 예전에 있던 연대 정문 근처에서 한참 더 올라가야 치과 병원이 나왔다. 가끔 결혼식에 참석하러 들렀던 연대 동문회관 뒤에 있었다. 엑스레이와 CT를 찍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예전과는 달리 의자마다 파티션이 있었다. 예전엔 당연히 없던 모니터와 싸인 기계도 있고, 소아치과가 아니라서 그물은 당연히 없었다.
진단 결과 3개월 정도 지켜보고 수술을 하기로 했다. 수술이라고 해도 당일 입, 퇴원이 가능한, 20분이면 끝나는 가벼운 수술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했던 수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암. 이런 생각을 하며 병원을 나섰다.
이번에 진료가 끝나면, 70살 정도에 다시 세브란스 치과를 찾게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