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공간을 산책하는 일
몇 걸음 떼자마자 도르륵 하고 땀이 날 만큼 더운 여름날은 산책이 고행에 가깝다.
객기에 가까운 충동으로 이방인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한 여름의 열기를 그대로 흡수하고 느끼며 산책길을 걸어본 적도 있지만 그 뒤로는 다시 시도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한 여름의 가슴 아래부터 허리까지의 기간에는 산책로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그런 상황은 전혀 별개라는 듯 산책을 해야만 풀릴 수 있는 일들이 계속 쌓이고 얽힌다는 것이다. 나의 가슴팍부터 허리까지 가득히.
그럴 때는 시원한 에어컨이 작동하는 공간으로 산책을 나서본다. 걷는 행위는 없지만 새로운 공간에 자신을 두고 그곳에서 생각이 유영하게 한다.
초반엔 공간의 구석구석에 눈길을 두며 구경한다. 묻어 나오는 공간 주인의 ‘취향’이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이면 그런대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면 또 그런대로 이런저런 나만의 코멘트를 달며 탐색한다. ‘여기는 원목 가구를 전부 맞춤 제작하셨네, 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는 일관성이 없는 걸 보니 인테리어용 묶음으로 이곳에 왔나 보네.’ 같이.
그다음으론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을 본다. 상대방이 눈치채거나 불편한 기색을 느낄 새 없이 쓰윽 보고 말긴 하지만, 공간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 흥미롭다. 노트북을 펼쳐 손을 얻고 몇 시간을 앉아있지만 키보드 하나 건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책이나 영상에 몰두해있는 사람, 같이 온 이와 비밀 얘기를 큰 소리로 하는 사람. 조금만 눈길을 두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씩은 호기심 포인트를 발견하게 된다. 호기심 포인트라고 하는 이유는 호감이나 비호감 같은 감정이 베이스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호기심이 베이스가 되는, 궁금하게 하는 부분을 주로 찾기 때문이다.
익숙한 산책길과는 다른 새로운 자극은 신선한 공기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처럼 생각을 환기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간혹 이런 환기가 그 무엇보다 필요할 때도 있다.(그게 언젠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지만)
하지만 속이 시끄러운 사람은 이내 자신으로 돌아가고 만다. 새로운 공간과 자극 사이에서 환기를 마치고 나면 다시 문을 닫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가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린다. 아침에 깨면 발목이 간지러운 듯 서늘하고 건조한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