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앵그리휴먼 Aug 03. 2022

산책이 영혼을 구원하는 순간들 : 함께 걷기

혼자였던 길을 함께 걷는 일

매번 오가던 산책길을 한동안 떠나게 되었다. 독립을 하게 되면서 인데, 이 집을 떠나는 것보다 이 산책길과 멀어지는 게 더 슬플 만큼 이곳은 내게 큰 구원이었다.  이사가 1주일 정도 남은 시점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산책길로 나섰다. 매번 걷고 봤던 곳이지만 부지런히 더 걷고 보고 새겨두고 싶었다.


주로 혼자였던 산책길이었는데, 이 날만은 그 길에 다양한 감정과 장면과 사람이 입혀졌다. 또다시 오랜만에 이 길을 찾게 되는 날,  그 모든 장면과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길에는 끝이 있고 우리의 걸음과 만남에도 끝이 있겠지만, 그 함께의 순간이 길에 가만히 담긴다. 혼자였던 순간은 거짓이 된다.

언젠가 근처에 놀러 온 이들과 함께 이 산책길을 소개하며 걸었다. 혼자였던 날의 나의 산책 감상을 말했다. 시간대별 방문객 구성의 특징이나 새로 알게 된 계절 변화의 조짐 같은 소소한 발견이었다. ‘여름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봄에는 민들레 꽃씨가 목화솜처럼 뭉쳐 길가에 쌓인다’ 하는 종류의. 기특해하는 반응과 칭찬에 신이 나버리고 마는 어린애 같았다. 이렇게 마냥 신이 나버리는 일은 아주 드물어서, 이 사람들을 소중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좌절했고 설레었던 나의 연인들도 스쳐갔다. 아주 늦은 밤이 되도록 계단에 앉아 서로의 마음 여기저기를 어루만지던 때가 있었다. 비슷한 장면 속 다른 사람과 다른 마음이 꽤 재밌는 모양새로 얽혀있어서 그 계단에서는 피식 웃게 되었다. 누군가는 확인을 원했고 누군가는 질문을 원했고 누군가는 그 순간만을 원했다. 모두 다른 걸 원했지만 내게 그 모든 얼굴과 장면들이 그곳에서만큼은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명절엔 가족과 이곳을 걷는 게 하나의 코스였다. 기름진 음식을 잔뜩 만들어 먹고 대부분의 친척들이 떠나고 난 저녁. 나는 엄마, 이모와 함께 편안한 차림으로 그곳으로 가서 거닐곤 했다. 고백하자면 둘과의 산책이 즐겁진 않았다. 의무에 가까운 일이었다. 혼자일 때처럼 생각이 정리되거나 친구, 연인과 함께일 때처럼 상대방의 말이 재밌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했다. 아무런 재미도 의미도 관심도 없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별생각 없이 그냥 웃으며 걸었다. 걱정이나 불안은 모두 집 안에 두고 나온 것처럼 평안하고 편안한 마음만 남아 있었다.

무의미한 영겁의 시간이 그 자체로 반가울 때는 결국 애정 하는 이들과 함께 일 때다. 무의미한 모든 대화와 웃음과 눈물과 행위가 그리하여 더 사랑스럽다. 평안하다고, 행복하다고 감히 생각하게 된다. 밀물이 오는 것뿐이지만, 다시 썰물이 올 걸 잘 알지만, 그 밀물에 몸을 맡겨보게 된다. 함께 걷게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