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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m Mar 27. 2020

이 시대에 과연 금기가 존재하는가 [디지털 성범죄]

 금기. 금하고 꺼리는 것(禁忌). 금기는 고대 신앙의 절대적 규율이었으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금기는 모호해지면서 현대 사회에서는 법과 제도가 그 역할을 일부 담당하고 있다. 집단은 나름의 금기 없이 유지될 수 없고, 금기 또한 집단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N번방, 박사방 등을 포함한 텔레그램 집단 범죄 현장에서는 금기를 넘어 최소한의 윤리 의식마저 증발해버린,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세계가 펼쳐졌다.


 한 개인의 윤리의식의 초석은 초자아(superego)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초자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그 본을 뜬 뒤에, 성장하면서 접하는 어른과 윗 세대 그리고 사회적 규범을 보며 그 성질과 모양을 수정하고 굳혀간다. 한편 이드(id)의 충동 해소를 위한 자아(ego)의 일탈은 외부의 검열과 시선, 초자아가 부재하는 곳에서 몰래 행해진다. 하지만 세대를 거쳐 일탈의 현장이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가상현실적 매체가 되면서, 일탈은 일탈 그 자체로부터 마저 탈출해버렸다. 그곳에서 초자아가 해체되면서 범죄자가 집단적으로 발생했다.


 이 사건이 하루아침에 생긴 일은 아니다. 무너진 성 윤리 의식의 뿌리를 찾아 가까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김학의 무혐의, 버닝썬 게이트, 정준영 단톡방, 다크웹, 소라넷, 장자연 리스트, 밀양 집단 성폭행, 빨간 마후라.. 여성 혐오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는 일련의 집단 성폭행 성착취 사건들이 그간 사회에서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에 비하면 개인의 일상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단톡방 성희롱, 몰래카메라, 스토킹 등은 경범죄 취급을 받아왔다. 이 모든 것은 언제나 끓어 올라오면서 차고 넘쳤지만 기성 사회는 그것을 관망하고, 잊혀지도록 유도하고, 흔히 있는 일들이니 잊으라 했다. 가해자의 절대다수는 남성이며 피해자의 절대다수는 여성으로 이분되는 성범죄는 어째서인지 젠더 갈등이라는 말로 희석되고 음모론과 함께 정치적으로 오용되면서 본질은 연기처럼 흐려진다. 종국에는 조용히 묻힌다.


 그리고는 이제야 성인 여성뿐만 아니라 소아청소년에게 가해진 잔혹성의 일부와 함께 가해의 집단적 규모가 알려지면서 텔레그램 N번방을 위시한 디지털 성범죄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최근 대형 일간지 매체에서 이 사건이 보도되고 지금과 같은 공론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텔레그램 사건은 이미 작년부터 SNS 등지에서 꾸준히 문제 제기가 되어왔으며, 추적단 불꽃의 두 여대생과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Project ReSET 등을 비롯한 여성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들 또한 이 오랜 과정 속에서 성범죄라는 단어 하나로 암시할 수 없는 참혹한 성착취와 성고문의 현장에 노출되었다. 우리는 모두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수사 중인 경찰의 보고에 따르면 이번 디지털 성범죄 주도 피의자 및 가담자의 다수는 10-20대 남성이다. 반면 동세대 10-20대 여성은 최근의 스쿨 미투를 비롯한 여성운동과 페미니스트 담론의 새로운 장을 펼쳐가는 주 집단이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기성세대로 편입하는 길목에 서 있는 성인으로서 여학생들의 스쿨 미투를 보며, 눈과 귀를 틀어막고 살아온 스스로의 학창 시절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때의 나와 또래들은 어땠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떤지.


 박사방 동시접속자가 천명이든 만 명이든, 박사방을 비롯한 여타 모든 방의 입장자 도합 추산이 2만 6천 명이든 26만 명이든 그 숫자는 중요치 않다. 어차피 26만이라는 숫자도 믿고 싶지 않겠지만, 소라넷만 해도 회원수가 이미 100만을 넘겼었다. 그리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인 현시점에서도 포르노 사이트에서는 텔레그램이라는 단어가 검색어 순위권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은 기성세대가 책임을 묵과했기 때문에 벌어졌으며 우리 사회는 결국 여성뿐만 아니라 소수중의 소수, 약자 중의 약자인 소아청소년마저 보호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간 미성년 남성 범죄자들을 양산해왔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피부로 느낀다.


 인격의 대상화와 정신적 살인을 수시로 ‘성욕’에 의한 순간의 잘못이라고 축소 합리화하는 기성. 행여 ‘성욕’이라 할지라도 과연 합리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지. 성욕을 무적의 방패로 삼는 바람에 성과 본능, 폭력의 개념이 부적절하게 연합하여 혼동되고 있다. 100여 년 전 Freud가 정신분석이론을 주장할 때에 당시 사람들은 그가 ‘모든 것을 성으로 설명’ 하려 한다며 호되게 뭇매를 날렸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는 남성의 성욕은 조절할 수 없는, 따라서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라 당당하게 외치며 ‘모든 것을 성(욕)으로 설명’ 하려 한다. 실재하는 ‘평범한’ 여성과 소아청소년의 신상을 털고 촬영한 스너프 영상을 그저 야동이라 일갈하며, 정당하게 그것을 소비했기 때문에 처벌이 억울하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익명의 ‘평범한’ 남성… 으로 포장되는 범죄자들. ‘평범’이라는 단어에 대한 게슈탈트 붕괴 현상은 오래전부터 겪어왔다.


 그렇게 우리의 곁에서 ‘평범한 남성’ 이 되어 갈,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된 청소년들의 성은 윤리 의식 대신 폭력으로 점철된 지 오래다. 올바른 본보기와 롤모델이 부재하고 초자아가 해체된 이 시대 기성의 산물. 그 기성은 추락한 권위와 없는 품위를 끌어안고 ‘요즘 사람들’을 비웃는 비대하고 추악한 카르텔. 다행히도 그 반대에서 소수의 선봉장들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하며 앞서 나가고 있지만, 변치 않는 고인 세력들로 인해 현대 한국 사회의 시민 의식은 심하게 분열되어 있다. 이 분열의 아노미에서 자정 작용을 기대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헛된 희망이나 다름없다.


 여기에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정당한 사회적 규범의 법제화다. 법과 제도만이 해체된 초자아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보조해 줄 수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최소한의 할 일이다. 분개한 국민들이 하나 되어 강력히 요구하는 사법행정권에서의 신상 공개는 그간 방만했던 국가의 태도에 울리는 경종의 상징이다.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법적 처벌과 규제 강화이다. 신상 공개의 요구 청원에 참여하는 지점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이 악성 시스템의 개선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지 끝까지 입법부를 감시하고 요구하고 압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를 내야 사회의 공기가 바뀐다. 약자를 외면하는 원칙을 뜯어고치는 것이 시민의 도덕적인 권위이자 권력이며 이것은 이미 촛불 탄핵 시위에서 모두가 경험했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에게 수치심과 피해자 다움을 투사하고 강요하며 조롱과 함께 2차 가해를 하는, ‘진정한 수치’를 모르는 사회. 의료 인력을 갈아 넣어 코로나19의 방역 모범 사례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살기 좋은 나라라고 착각하는, 의제강간 연령 만 13세의 인권 후진국.


 최악의 상황이다. 모두가 가리키는 달은 외면하면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여성의 손인지 남성의 손인지 따위를 언제까지 정치적 화두로 소비해야 하는가? 감히 국민의 알 권리를 들먹이며 성급한 신상 노출로 사법행정부의 권위를 도외시한 대형 언론이 앵무새처럼 떠벌리는 조주빈의 개인사에 몰입할 이유 또한 없다. 그들은 조주빈을 그가 스스로 일컬은 그대로 ‘박사’, ‘악마’라고 하는 동시에 ‘평범한 남성’이었다고 한다. 박사와 악마라는 단어 선택에서 범죄자의 컴플렉스가 얼마나 과대망상적인지 알 수 있다. 범죄자 당사자 또한 스스로를 악마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는 그저 악마성에 권위를 의탁한, 대표성을 띄지 않는, 초자아가 타버리고 남은 검은 무리의 티끌일 뿐이다. 그렇게 언론이 악마와 이중성이라는 단어를 오남용 하면서 그 옆에 ‘평범한 남성’을 덧붙이는 바람에 실추된 것은 오직 남성의 평범성뿐이다. 평범하다는 것과 산재하다는 것은 다르다. 금기와 법이 부재한 이 시대에 산재하는 범죄자들은 소라넷, 일베, 다크웹, 단톡방, 텔레그램, 디스코드 등의 플랫폼을 갈아타며 무한 증식하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수많은 성인 여성과 소아청소년을 노예, 지인 능욕이라는 저급한 말과 비열한 행위로 가학 하고 있다.


 단체방에서 벌어진 범죄를 관전했지만 그저 보기만 했다고 되뇌는 것.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범죄를 목도했지만 나와 내 주변은 그러지 않았다고 되뇌는 것.

 언제까지 ‘나는 안 그랬다’, ‘나랑은 관련 없는 일이다’, ‘여자가 조심해야지’ 라며 방관할 것인가? 당신이 가해자가 아니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디 그것을 중립적 태도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의 원죄는 깨어진 금기에 대한 방만이다.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버리는 무책임한 태도는 정의의 반대편으로 드리우는 중립의 그림자에 숨는 것이다.


 그간 자성 없이 기성으로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선 성인들은 스스로의 책임감과 지성을 돌아보고 발휘해야 한다. 직업윤리가 결핍된 것으로 보이는 몇 언론들이 횡행하는 현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리고 특히 당신이 누군가의 심신 건강에 대해 어떠한 의술을 행할 자격을 부여받은 의사라면.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바꾸어 나가고 싶다면 더 이상 피해자와 약자로 이루어진 소수 연대에 빚을 져서는 안 된다. 금기가 없어진 폐허에서는 모든 개인의 그 어떠한 성역도, 주류성도, 품위도, 보호도 존재할 수 없다. 팔짱만 끼고 있을 특권과 그 정신 건강도 어차피 곧 피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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