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m Apr 16. 2020

동상이몽

 요즘은 출근하면 근무시간 내내 진료를 본다. 새삼 이런 환경에 감사하게 되는 이유가, 전공의 시절과 너무 대비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당연한 것들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수련 영역 밖의 잡무와 온갖 수직/수평적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 내 능력의 한계 등으로 인해 지금만큼 '오로지 진료' 에만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지금은 정말 좋은 상사 아래에서 일을 하는 덕분에 정말 '오로지 진료'만 하다 보니, 새삼 내가 서비스업 종사자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 인식이 이렇게 뒤늦은 데에는 그간 수련을 받는 포지션에서 수동성을 극복하지 않은 내 태도와 대학병원의 위상에 의존해온 습관성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고로,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가장 첫 번째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첫눈에 비호감 인상을 주지는 않도록 외양을 더 가꾸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인해 진료 시에도 계속 마스크를 쓰면서 이건 또 잠시 후순위로 밀렸고... 두 번째로는 쉬는 날에 주변의 몇몇 비의료인에게 물어봐서 시장 조사(?)를 좀 해보았다. 좋은 의사의 요건에 대해서. 


Q. 어떤 의사를 원하나 or 선호하게 되는가?  

- A : 성의 있고 조리 있게 설명해주는 

- B : 공신력 - 대학병원의 진단서 등 / 내 이야기를 듣는다는 느낌이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 C : 친절한, 자세한

- D : 친절, 반말하지 않는

- E : 본인이 원하는 말만 듣고 내보내려고 하는 거 너무 싫다. 


 생각보다 물어볼 사람이 몇 안되어서 아예 한나절 잡고 구글 검색도 해봤다. 검색어는 '좋은 의사' '바라는 의사' '어떤 의사' '친절 의사' 등등.. 데이터를 정리해서 제시할 여력은 안되지만 결론적으로 내가 받은 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료 시 친절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다는 것이었다. 남녀노소 어느 직업을 불문하고 불친절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겠지만,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친절을 원하는/필요한 조건으로 꼽게 된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의사 중 친절함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시사하는 결과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하긴 전공의 시절 협진을 보러 다른 과 병동을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 병동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언행을 하는 타과 동료 선후배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친절을 베풀지는 않더라도 굳이 불친절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은. 친절/불친절의 영역이 아니라 단순 인성 차원에서 본인의 지도교수 등 상급자를 향한 태도와 환자를 향한 태도 사이의 간극을 조금만 좁혀도 될 성싶은데 말이다. 


 어쩌다 친절로 얘기가 빠지려고 하는데.. 각설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이 화두의 출발점은 '초진 이후에 다시 내원하는 사람과 오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었다. 지금 일하는 직장은 지리적 특성상 유동 인구가 어마어마하고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방문이 용이하다. 그래, 알고 있다. 쉽게 오갈 수 있다는 거. 오는 게 쉬우면 안 오기도 쉽다는 거. 서비스 제공 측면 외의 요인도 다양하게 작용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생각해보았다. 생각도 할 수 있을 때에 해두어야 하니까.


 내담자들은 일상을 살아가던 도중에 생긴 곤란함, 어려움, 불편감 등에 대한 대응책 중 하나로 병원에 와보기를 선택한다. 이곳은 응급실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방문하기까지 정말로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이 만약 단 한 번의 방문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간다면 최상의 시나리오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진 않다. 애초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모를까.


 병원에까지 오게 만든 문제는 절대로 한 번에 해결될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너무 바쁘거나, 일상의 루틴에 치료를 끼워 넣을 만한 여력이 없거나. 혹은 방문 경험이 너무 별로였거나, 아니면 스스로 저울질하고 있는 여러 대안중에 병원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거나. 내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뒤의 두 가지 혹은 그와 비슷한 경우들이다. 이런 경우들을 가정해보면 아마도 - 병원에 오게 만든 증상의 수준, 치료가 필요한 이유, 치료 계획 등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설득이 부족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제공자 입장에서 돌이켜보면 내가 최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항상 한 줌 이상 남는다. 




 나는 정신의학이야말로 의학 중에서도 객관적인 Evidence의 측정이 가장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이 영역에서는 더더욱 자세한 설명과 설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은 정신과의 문턱이 낮아진 시대라고 하지만, 절대로 개별적 질환에만 국한되지 않는 정신과 영역 전반에 여전히 존재하는 stigma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도 거기에 한몫한다. 현대 의학의 한 분야로 뚜렷하게 자리매김을 했음에도 이런 stigma가 있다는 건 사회에서 정신의학이 아직 제대로 가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단적인 예를 들면, 누군가가 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조현병 환자를 상대로서 인식하고 만나는 경험을 해 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스웨덴처럼 국가 주도하에 전국적 탈시설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일상 속에서 이들을 발견하게 될 체감 확률은 현저히 낮을 것이다. 너무 드문 케이스라고? 조현병은 유병률이 무려 1% 인데.. 그렇다면 굳이 만성질환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현 직장에서 내가 주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만성질환보다 상대적으로 일상 기능의 저하가 적은 mild case들이 대다수이다. 어려움이 생기지만 이렇게 어쨌든 일상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초진을 보러 오기까지 부정하고 망설이는 과정을 정말 많이들 겪는다. 병원 방문 자체를 주변에 알리는 것도 쉽지 않고, 굳이 들키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그렇게 용기 내서 오면 그간 혼자 고민했을 <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나처럼 온 사람들이 또 있는지> 조심스레 질문한다. 문턱이 낮아졌다면서... 더 낮아져야 하는 거 아닌가? 


 사각지대의 가시화는 그간 해온 것처럼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법뿐이다. 주류에 의해 굳건히 유지되는 정상성이라는 허상의 틀을 조금씩 넓혀나가면서 결국엔 용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그 맥락에서 정신과 의사가 일상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진료실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일이 교육과 설득이라고 생각한다. 초보 의사 시절에는 나도 물에 발을 담근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 공부 하기에 급급해 환자와 보호자에게 어설프게라도 설명을 해준다는 행위 그 자체로 만족(혹은 안도)했다면.. 지금은 내 설명이 얼마나 상대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이었는지, 과연 내 말에 설득력이 있었는지가 관건이다.


 진료실에서 처음 만난 내담자에게 집중하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 보면 30분은 훌쩍 지나간다. (초진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근무 환경에 매우 감사한다.) 그런데 만약 뒤에 또 다른 예약이 있다면 그때부터는 약간 조급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증상과 치료 계획에 대해 후다닥 설명하고 나서는 항상 후회가 남는다. 아, 너무 듣는 데에만 집중했나. 필요한 정보도 전달을 해주어야 하는데. 내 말이 전달은 잘 되었을까. 대화의 상호 작용이 뭐 그리 어렵냐고 고수들이 반문하면 할 말은 없지만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의학이라는 학문의 병리적 접근법에만 단련되어 온 나로서는 대화의 장 안에서 시야각을 넓히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인생 경험이 많다고 할 수도 없는 나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만 살아왔고, 그래서 또 그만큼 두렵기도 하고. 하지만 이대로 편협해지고 싶지는 않다. 


 모르는 단어와 개념 찾아가면서 이미 수년 동안 공부하고 시험까지 보았던 내게는 당연하고 익숙한 내용이지만 고민 끝에 어렵사리 내원한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과연 어떻게 들릴까. 그렇다고 전달력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너무 단순화 해버 리거나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류의 부적절한 비유를 제시한다면, 실제 정보와의 간극이 너무 커서 왜곡 수용되기 십상이다. 내가 개떡같이 말하면 개떡으로 들린다. 잘 못 알아들어도 끄덕끄덕 넘어가 주는 사람은 있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기인은 없다. 이런 걱정으로 또 제한된 시간 안에 빠르게 무미건조한 팩트를 쏟아내면 결국 설명이 아닌 그저 설명 의무에 충실한 지식의 나열 혹은 배설에 불과할 테고.


 과연 나는 경청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 마이동풍?

 상대의 삶과 내가 듣고 있는 것 사이의 여백은 얼마나 될지 - 등하불명?

 내가 제공하는 정보는 과연 몇 퍼센트 정도로 잘 전달이 되었을지 - 동상이몽?


 한 번의 면담 안에서 니즈 파악과 정보 전달, 설득을 적절히 멀티태스킹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전공의 시절에 열심히 읽었던 칼 융의 전집 1권에서는 융 선생이 한 권 내내 같은 내용을 강조한다. 정신치료 시에 치료자는 개인의 증상이 아닌 한 사람 그 자체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읽을 땐 머리론 이해했다고 생각 -착각- 했는데 요즘 들어 그 말이 자꾸 떠오른다. 결국 그때그때 앞에 있는 상대에 따라 적절한 맞춤이 필요한데, 내 지식과 전달력의 기본값에 대해 단순 자기만족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퀄리티를 쌓아놓아야 그 유연성도 보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담자를 치료 과정에서의 협업 상대로 참여하도록 이끌려면 결정적으로 친절도 더더욱 무시할 수 없는 덕목일 수밖에 없다.




 브런치 첫 글에 대해 받은 피드백이 ‘쉬이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런 피드백이 잘 와 닿지는 않았었는데 왜냐하면 나 스스로가 원래 쉬운 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준을 논하는 게 절대 아니다. 누군가 글을 쓴다면 긴 글을 고심해서 쓰고, 읽는다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글을 읽는 도전을 통해 지적 사고와 두뇌의 계발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달력과 설득력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그 쉽지 않다는 말이 '불친절하다'는 것과 비슷함을 알게 되었다. 굳이 모든 글을 쉽게 쓸 이유는 없지만, 쉽게 읽히는 글도 잘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 것이다. 진료실 안에서의 동상이몽 극복 프로젝트와 그 방향이 비슷하다. 글도 생각도 말도, 얼마든지 뻗어나가는 것은 좋지만 현실에 발은 항상 붙일 수 있어야... (Down to earth!!)


 어쨌든 결론적으로...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직업이 주는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내담자의 순종성에 어느 정도 기여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는 절대로 대고 싶지 않다. 그런 것이 강조되는 관계는 요즘 거의 기능하지도 않을뿐더러 leading role 혹은 helper라는 미명 하에 악용하고 싶지도 않다. 속된 말로 진짜 극혐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럴 여지가 만연하기 쉬운 대학 병원이 점점 더 싫어진다. 하지만 그 외부에서 학문의 신구(新舊) 패러다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 스스로가 그만큼 많이 노력을 해야 한다. 


 이번 글도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어서 길게 썼지만 역시 간단한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계속 공부 열심히 하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도록, 몰랐던 것들이 알려지도록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일 - 설명하기, 전달하기, 설득하기 - 의 능력치를 갈고닦는 수밖에. 부디 사람들이 자기의 몸 어딘가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바로 인식하는 것만큼, 마음 상태의 변화를 지각하는 행위 자체가 일상적으로 자타에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당연한 수준의 일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변화를 향한 나의 급선무는 내담자의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기, 동상이몽 경계하기.


작가의 이전글 이 시대에 과연 금기가 존재하는가 [디지털 성범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