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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May 14. 2022

40대의 덕밍아웃

"무슨 안 좋은 일 생긴거야? 왜? 무슨 일인데?"

문자를 확인하고 속상한 마음에 탄식을 내뱉었는데 친구가 적잖이 놀랬나보다.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욱 똥그래졌다. 

"아, 그게..주헌 배우님이 나오는 연극을 예매했는데 부상을 당해서 캐스팅 스케줄이 바뀌었다네. 많이 다치셨나? 어디가 얼마나 다치신거야?"

순간, 그녀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으이그! 난 또 뭐라고.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줄 알았네"

잠시나마 온 신경을 곤두세운 것이 못내 약올랐는지 친구는 눈을 잔뜩 흘기며 내 등짝을 내리친다. 

"아이고, 철 좀 들어라! 이 나이에 무슨 팬질이니? 여유롭다, 여유로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배우님의 SNS계정에 들어가서 새로 올린 피드가 없는지 확인하기에 바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게 특별한 인물이다. 남들이 새해 첫 날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다고 법석일 때 나는 그분을 실물로 영접하기 위해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A블록 3열 8에 앉았다. 이래뵈도 우리는 2022년 첫 날을 함께 보낸 사이라 할 수 있다. 그 날 이후로 오매불망 기다려왔는데 이게 무슨 황망한 시츄에이션인가. 


배우 김주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톱스타는 아니다. 사진을 보여줘도 열에 여섯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당연하다. 오랜 세월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고 브라운관에 진출한지는 얼마 안되었으니 말이다. 드라마에서 주로 조연을 맡아왔기 때문에 인지도가 아직 높지는 않다. 모두가 박보검, 송혜교를 연호하며 드라마 '남자친구'를 정주행하는데 나는 어쩐일인지 동네 형이자 골뱅이 호프집을 운영하던 '이대찬'역에 마음이 끌렸다. 극중에서 화려한 스펙 하나 없어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당당하게 자신을 어필하는 남자였다.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배우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고 다수의 작품에서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는 것을 줄곧 지켜보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된 정서가 따뜻했고 그것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여겨졌다. 꿀보이스에 대사전달력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아 좋았다.


당시 내가 암울하던 시기를 겪고 있어서였을까. 만인이 주목하는 주인공보다 작지만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조연이 더 와닿았다.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프로페셔널한 면모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그를 열렬히 응원하고 싶었다. 점진적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극적인 변화를 원했다. 본격적으로 입덕하게 된 이후에는 배우님의 사생활에도 관심을 쏟았는데, 그는 한때 미술을 전공했을 만큼 드로잉이 수준급이고 틈틈히 다이빙을 즐긴다. 배우님도 나처럼 40대이고 여전히 싱글이라 왠지 모를 공감대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때는 욘사마를 보러 남이섬을 찾아오는 일본 아주머니들이 주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내가 40대에 이런 팬심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친구 말대로 내가 육아와 살림을 하지 않아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삶의 낙을 찾고 싶어하는 본능이 아닐까도 싶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관계에 있어서 계산을 앞세우기 쉬운 나이에 어떤 한 사람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띤 지지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 감정을 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무료한 일상에 활력이 되고 순수한 감성을 자극한다. 


물론 십대때와는 결이 다르기는 하다. 여고시절에는 동경하던 연예인을 너도나도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느님(오빠+하느님)을 믿는 신도들 사이에서는 오빠란 우리 인간 나부랭이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서 볼일을 보러 화장실도 가지 않을거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끼리 '니꺼니,내꺼니'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며 소유욕에 활활 불타오르다 오빠가 미모의 여배우와 열애 스캔들이라도 나면 배신감에 파르르 떨며 탈덕해버리는 그런 달콤살벌한 행보를 서슴없이 보였었다. 반면 사십춘기에 연예인은 밥벌이라는 숙명을 함께 하는 전우에 가깝다.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에 대해 느끼는 것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연예계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하나의 인간을 편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그에게 사심을 듬뿍 담아 안부를 묻는다. 덕질에 나이는 없는 법. 나이가 들수록 온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나만의 심리적 안식처가 필요하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물론 취미활동이어도 좋다. 생계에 얽매이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몰입하는 시간이 나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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