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속 지도앱을 빤히 보다 좌절하고 만다. 간편하게 길을 찾을 수 있는 스마트한 세상이면 뭐하나. 지도 위에 친절하게 그려진 경로를 보고도 헤매는 것을. 태생적으로 공간지각능력이 부족한 나는 매번 경로를 이탈해서 이 고생을 한다. 분명 목적지 근처까지 다 왔는데 이상하다. 성격 급한 나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다짜고짜 물어보고 싶은데 어쩜 동네가 이리도 적막하단 말인가. 시끌벅적한 서울에 살면서 이런 조용한 골목은 오랜만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40분.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았다. 서점은 저녁 5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 이 대목에서 당신은 의아해 할 것이다. 내가 찾는 곳이 고작 서점이라는 것에 말이다. 실망은 이르다. 연희동 '밤의 서점'은 그렇고 그런 서점이 아니라 특별한 매력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TV에서 처음 접하고 언젠가 꼭 찾아가겠노라고 다짐을 했었다.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지인과의 약속이 있어서 홍대 근처에 왔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가 아쉬워 나 홀로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모험. 나는 이 단어가 주는 묘한 설레임과 긴장감을 좋아한다. 그래, 핸드폰 보는 것을 그만두고 길을 잃어보기로 한다. 낯선 이 곳을 한량스럽게 어슬렁 어슬렁 걸어보는 거다. 길을 잃는게 아니라 시간을 잃어버리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무렵, 한 바퀴를 돌아 원점으로 온 듯 했다. 그 때 내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밤의 서점'이라는 작은 입간판. 고개를 들어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공간이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하고 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오픈 전에 가게 셔터가 내려져 있어서 감쪽같이 감추어져 있었던 이유다.)
나는 보물 상자를 열듯이 잔뜩 마음이 부풀어 올라서 문을 연다. 서점은 생각보다 작아서 다락방에 숨어들어 오래된 서재를 들춰보는 기분이었다. 진열된 책들에는 정감있는 손글씨가 적힌 띠지가 둘러 있는데 먼저 책을 읽은 점장의 정성스런 소감이다. 인쇄로 출력된 홍보물보다 확실히 내적 친밀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추천 코멘트를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모조리 다 구매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혼났다. 워워. 심혈을 기울여 의미있는 책 한권을 선정하겠노라고 스스로를 진정시켰을 때 '블라인드 데이트(Blind Date)'라는 코너가 내 눈길을 끌었다. 책들은 포장되어 있어 저자나 제목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 수 없다. 책을 연상시키는 키워드가 적힌 블록을 뽑아 해당되는 책을 당첨받는 것이다. 코너 이름 그대로 책과 소개팅하는 셈이다. 어떤 사람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지 기대하는 심리를 담았다.
내가 선택한 블록은 55번. '삶을 지독하게 사랑한 남자'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는 키워드에 한껏 달아올랐건만 점장의 한 마디가 찬물을 끼얹었다.
"어쩌죠? 이미 판매된 책인데 블록이 잘못 섞여있었나봐요. 죄송합니다."
순간 김이 확 샜다. 실망하는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점장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저희가 월별로 블라인드 북을 선정하기도 하거든요. 5월의 책은 어떠세요? 키워드는 '시, 죽음, 그리고 어쩌면 시작'입니다. 마침 막 포장이 끝나서 진열하려던 참이었어요. 딱 한 권 있거든요"
시절인연. 그 말이 생각났다. 모든 인연에는 반드시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게 되어있고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람이나 일 그리고 물건과의 만남까지도 어쩌면 깨달음의 시기마저 모두 그 때가 있는 법이라고 들었다. 5월의 책이 어떤 내용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아니, 그것을 이해하기에 내가 적당히 여물었다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삶의 행간을 파악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지금 내게 벌어지는 일들의 숨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우주가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메세지를 이해한다면 좋겠다. 오늘 내가 마주한 이 퀘스트를 완수해야 다음 퀘스트도 있으니 영혼을 끌어모아 현재의 인연에 충실하자. 결국, 나는 운명처럼 찾아온 인연을 받아들인다.
집에 돌아와 경건한 태도로 조심스레 포장을 풀었다. '의사 도쿠나가 스스무와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 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묶은 <시와 죽음을 잇다>' 놀랍게도 내게 낯익은 책이다. 몇 차례 만지작거리다가 지나쳤던 기억이 났다. 휘리릭 책장을 넘기다가 멈칫했다. 197페이지. 손 끝으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읽어본다.
내가 태어났을 때 세계는 바쁜 가운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바로 행복을 알았다. 딱히 남에게 사랑받아서가 아니다. 나는 다만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환희를 깨달았다.
가만히 음미할수록 깊이가 있다. 왠지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되지 않을까란 생각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가까운 미래에 유난히 책을 좋아하는 지인을 위해 '밤의 서점'의 고백서가를 이용해보고 싶다. 선물할 책을 편지와 함께 밤의 서점에 맡기면 점장이 그 주인공에게 문자를 보내준댄다. 당일 배송이 판 치는 요즘 시대에 뜻밖의 문자를 받고 서점에 직접 찾아가 누군가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 그 느릿한 아날로그 감성을 선사할 예정이다. 그대에게 진심을 전할 상상에 벌써부터 나는 조금 들떴다.
아직 나는 낭만에 기대어 살고 있다. 오늘처럼 길을 헤매어 보고 손글씨의 온도에 취하기도 하면서. 때론 내게 찾아온 인연을 운명에 맡겨보기도 한다. 낭만을 청춘의 전유물로만 삼는 것은 너무한 처사다. 좋은 건 함께 나누라고 배우지 않았나. 나이 들어도 약간은 눈에 콩깍지를 씌우듯 사는 것이 재밌다.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뭐든지 괜찮다고 여겨지는 그런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