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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Jun 04. 2022

일흔의 엄마가 나에게

수평선 저 멀리에서 먹구름이 몰려온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나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면서 두뇌를 풀가동해본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남은 몇 시간. 낙산사 구경도 해야하고 미리 검색해놓은 장칼국수 맛집도 들러야 한다. 아, 전통시장에서 마른 오징어와 쥐포도 사기로 했지. 날씨가 더 궂어지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겠다는 결론에 이르자 마음이 달음박쳤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호텔 앞 바닷가를 호젓하게 산책하고 있는 아빠 엄마를 찾아 나선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레이더망에 포착된 두 분은 얼핏 봐도 너무 신나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는데.' 

나는 벌써부터 그것이 못마땅하다. 곁으로 가서 이제 그만 가자고 채근을 한다. 소용없다. 엄마는 한껏 달떠서 바다를 향해 손을 휘젓고 아빠는 연신 카메라를 누르며 예술혼에 불타고 있다. 두 분은 기어이 인생샷을 하나 건질 기세다. 속이 탄다. 솜씨좋은 내가 나서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얼른 하나 찍어드리는 편이 낫겠다. 각도를 잡고 필터를 골라 렌즈에 피사체를 담는다. 일흔의 엄마가 소녀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엄마는 신발을 벗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발을 담근다. 발목을 간지럽히는 파도가 성에 안 차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바다로 나아간다. 


"어..어..위험해! 안돼! 엄마 나와요!" 

나는 질겁해서 호들갑을 떨며 소리를 지른다. 아빠는 그 정도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다. 일흔이면 노인이다. 파도가 들어왔다 나갈 때 다리에 힘이 풀려 순식간에 휩쓸려 가면 어쩐단 말인가. 내 눈에는 엄마가 아슬아슬하다. 날씨 탓에 조금씩 거칠어 지는 파도도 자꾸 거슬린다. 물보라가 일어나듯 내 영혼에 균열이 났다. 두려움이다. 언제고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참화가 우리의 단란한 일상을 빼앗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공포. 인간의 힘으로 촘촘히 계획을 세워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즈음부터 나는 겁쟁이 쫄보가 됐다. 신앙의 힘으로 나를 단련시켜 보지만 한번 균형을 잃으면 지금처럼 또 헤매고 만다. 


엄마는 그러지말고 함께하자며 나를 부른다. 인생에 대해 애매하게 터득한 마흔의 나와 달리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일흔의 엄마는 파도앞에 의연하다. 언뜻 자유로워보이기까지 했다. 팔을 높고 낮게 흔드는 것이 마치 파도의 강약을 지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온 몸으로 바다를 껴안고 있었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글귀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같이. 


나도 칠십년정도 살면 저리 될 수 있을까. 삶의 우여곡절을 다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경지가 문득 궁금했다. 어쩐 일인지 별안간 심통이 났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스스로가 탐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 모래투성이가 될텐데 바지는 그렇게 젖어가지고 언제 씻고, 언제 체크아웃을 하겠냐며 괜히 투덜댔다. 덧붙여 오늘 일정을 거듭 강조하면서. 거기에 잔뜩 지푸린 날씨 걱정을 한 보따리 보태어서. 


엄마는 살살 나를 달래며 말한다.

"여행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좋은 거야. 계획대로 안 되도 재밌고.바다를 보러 왔으면 바다에 뛰어들어야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이쁜 딸이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좋니. 엄마는 그냥 다 좋아. 너무 좋아"

그 뜻을 단박에 알아챘으나 괜시리 겸연쩍어 모르는 척 했다.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 엄마는 고수다. 겨우 깨달은 몇 가지 것들을 내 삶에 체화시키고 온전히 스며들게 하려면 나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엄마 나이가 되었을 때 바다여행을 꼭 해보기로 다짐한다. 엄마가 보고 듣고 느꼈을 그 풍경을 나도 그 나이가 되서 체험하고 싶다. 삶의 끝자락에야 비로소 오늘의 엄마를 이해하게 되겠지만 그 때는 정작 내 곁에 엄마가 없을꺼다. 남몰래 아빠, 엄마의 모습을 자꾸 훔쳐본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얼굴. 소중한 시간이 야속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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