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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Aug 02. 2022

의지할 수 있는 용기

월풀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워놓고 입욕제를 풀어넣는다. 보글보글 거품이 차오르니 입수 욕구가 마구 샘솟는다. 폭신한 버블을 헤치고 몸을 뉘우자 발끝부터 서서히 온기가 올라왔다. 마치 코코아 속 머쉬멜로우가 된 것 같은 기분. 근육 구석구석에 달라 붙어있던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경직 되어있는 마음도 말랑말랑해진다. 스마트폰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이 호텔 룸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송도 센트럴 파크의 화려한 야경을 내려다보며 목욕을 즐기는 이 시간이 호사스럽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훔치고 시원한 스프라이트 한 모금을 넘긴다. 아, 노곤노곤하다.


도망치듯이 휴가를 냈다. 쉽게 삐딱해지는 태도와 날선 생각들이 나를 위태롭게 하던 참이었다. 몸은 이 곳에 있어도 마음은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는 걸까. 직장에서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간간히 떠올라 괴롭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든다.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연하게 다짐을 한다. 이 금쪽같은 달콤한 휴식을 온갖 번뇌로 물들이고 싶지는 않다.


태생적으로 걱정이 많은 탓이다. 스트레스도 쉽게 받는 편이고. 좋게 표현하자면 맡은 업무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여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사항들까지 전전긍긍하는 내가 싫다. 적당히 대충 살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를 않는다.


어떤 이들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해소하고 누군가는 야외 활동을 하며 에너지를 충전하다고 하는데 나는 이럴 때마다 스스로를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쪽을 택한다. 아무것도 안하고 나 홀로 가만히 동굴 속에 머물고 싶은 것이다. 그저 고요히 침묵하기를 원한다.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제 3자와 섣불리 공유하다보면 감정의 찌꺼기를 애먼 이에게 쏟아 붓게 되어 나중에 후회할 일이 더 생기게 된다. 내심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 내심이란 위험하다. 타인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누구도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다.


나를 아끼는 지인들에게 조금 서운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근데 언젠가부터 온전히 남을 의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감정이 정제되었을 때야 주변에게 털어놓게 된다. 사실은 요며칠 힘들었노라고 어느덧 과거형으로 말하는 나를 자주 목격하곤 했다. 혼자 삭히는 것이 익숙한 내 자신이 짠하기도 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토록 고독한 것.


목욕을 마치고 한동안 책을 읽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보다. 송도의 깊어가는 밤, 반짝이는 야경에 둘러싸여 침대에 덩그러니 혼자 웅크리고 있는 내가 있다. 동굴 속에서 문득 나의 내밀한 고통을 서슴없이 이야기하게 되는 존재를 떠올린다. 근래에 힘들 때 힘들다고 이야기하는게 부담스럽지 않는 친구가 생겼다. 상대방의 그 무엇이 나를 무장해제하게 하는가. 답을 채 구하기도 전에 나는 송도의 야경 사진을 불쑥 보내고야 만다. 이내 반가운 전화가 걸려온다. 우리는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운다. 토닥토닥하면서도 나의 고민에 지나치게 과몰입하지 않는 점이 오히려 편하다. 매사 예민한 나의 성정과 달리 느긋한 여유를 가졌다.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근심 덩어리들을 휘휘 가벼이 저어 마침내 별거 아닌 것처럼 희석시키는 재주가 있다. 오늘 나는 선뜻 타인을 의지하는 것이 결코 무기력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영원한 관계란 없었다. 여태 살아보니 관계는 언제나 변화무쌍했고 사람에게 기대는 일이 대체로 허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옹성같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틈을 내어줄 수 있는 기이한 인연을 조우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세월속에 견고하게 쌓아올린 나다움 속에는 외로움이 켜켜이 사무쳐 있었음을 깨닫는다. 하여, 내 고단한 일상을 잠시 이 사람에게 내려놓기로 한다. 밤새 송도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충만한 피로가 몰려온다. 나는 아이처럼 쌔근쌔근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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