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와 극장 이야기 - 2화 -
종로를 중심으로 여러 극장들이 무림의 군웅할거 식으로 경쟁을 벌이고 있는 80~90년대 서울의 극장 시장.
그 싸움의 중심은 여러 극장들이 몰려 있는 종로이지만, 한 발 건너 우위를 점하며 하수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무림의 절대강자 소림사와 같은 극장이 있다.
바로 국내 최대 스크린을 자랑하는 대한극장이다.
대한 극장은 국내 최초로 70mm 영화를 볼 수 있는 대형 극장이었다. 이런 이미지와 걸맞게 대한극장에서는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운드 오브 뮤직', '마지막 황제'처럼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영화와 세기의 대작들을 많이 상영하였다.
또 상업영화도 '백 투 더 퓨처', '엑설런트 어드벤처' 같은 큰 화면으로 볼 때 재미가 더한 영화들이 주로 상영되었다.
창문이 없는 거대한 산처럼 도심 한 복판에 우뚝 서 있는 대한극장은 1958년에 야심 찬 개관을 하였다.
(당시 미국 영화사인 20세기 폭스사가 극장 설계를 맡았다고 한다.)
그 후 80~90년대 전성기를 누리며, 매년 관객 동원 1위 극장의 지위를 한동안 놓치지 않은 대한극장이었다.
자칭 마니아로 주로 혼자 영화를 보러 다니던 내가, 친구들과 같이 봤던 영화가 몇 편 있었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다 대한극장에서 상영한 영화였다.
백 투 더 퓨쳐(back to the future)는 미국의 신인배우(영화에서는 신인이지만 그전에 패밀리 타이즈란 드라마에서 꽤 인기를 얻고 있었다.) 마이클 제이 폭스가 주인공인 마티 맥플라이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은 영화이다.
자동차를 개조한 드로리안 이란 타임머쉰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다는 영화였고, 인기에 힘입어 미래로 가는 2편과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3편도 제작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친구들과 개봉일 대한극장 앞에서 굳이 새벽에 줄을 서 가면서까지 기다렸던 이유는 선착순 백 명에게 나눠줬던 티셔츠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생소한 문화지만, 그 당시에는 개봉일에 선착순으로 티셔츠 같은 영화 굿즈를 나눠주는 행사가 종종 있었다.)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마이클 제이 폭스와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연기도 재미있었고 자동차를 타임머쉰으로 사용한 소재도 기발하였다.
특히 자동차를 타고 시간을 오가는 장면과 같이 특수효과가 현란하고 스케일 자체가 큰 이 영화를 대한극장이 아닌 다른 극장에서 본다면 좀 다른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가끔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빽투더 퓨쳐 볼 때면, 극장에서 봤던 영화와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보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한 편은 1987년에 개봉한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 '로보캅(RoboCop)'이었다.
미국의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의 암울한 미래를 배경으로 갱들에게 살해당한 경관이 로봇 경찰이 되어 적들을 소탕하는 내용으로 로봇으로 다시 태어난 주인공 머피가 인간성에 대해 고민하는, 단순한 액션 영화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영화였다.
(하지만, 이 이후에 전편의 흥행에 힘입어 후속작으로 제작된 2편과 3편은 단순 액션 영화로도 보기에도 어려운 졸작이다.)
이 영화도 개봉일에 친구들과 줄을 서서 관람한 영화다. 그날, 선착순 백 명에게는 로보캅 분장을 한 사람과 같이 사진을 찍어 나눠주는 행사를 하였다. 지금 기억으로 그 로보캅 슈트를 입고 있던 사람은 외국인이었는데 사진을 찍는 동안 영어로 간단한 인사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 행사와는 상관없이 로보캅이라는 영화도 큰 스케일과 거기에 걸맞은 사운드가 웅장한 수작이었다.
이 영화도 70mm 넓은 스크린에 웅장한 음향 시스템을 가진 대한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이 두 영화는 몇 달 동안 꽤나 오랜 기간 장기 상영을 했고, 그 해 서울시내 관객 동원 1위 극장에 대한극장이 선정되는데 큰 기여를 했던 영화이다.
하지만, 굳건할 것 같았던 대한극장의 위치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관 극장 시대가 저물고,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되자 대기업 계열의 메이저 영화사들이 들어오며 종로를 중심으로 한 극장들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울 강북의 극장들은 기존 스크린을 멀티플렉스로 개조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려 하였지만, 퇴장의 속도를 조금 늦췄을 뿐, 단관 형태의 거대 극장들은 변화하는 지구환경에 마지막으로라도 살아남기 위해 저항하는 공룡과도 같은 신세였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대한극장도 2001년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재탄생하였다.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다른 극장들이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음에도 유일하게 대한극장은 아직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허리우드 극장처럼 실버극장 형태로 유지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일반 극장으로서의 기능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마치, 시대가 변하면서 중국 무림의 문파가 다 사라졌지만, 중국 숭산의 소림사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것처럼 대한극장은 아직 충무로에 굳건히 서있다.
요즘 자식들의 손을 잡고 대한극장을 찾는 중년의 관객들에게는 분명 중고등학교 시절, 영화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친구들과 줄을 섰던 희미한 추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극장으로서의 역할도 잘하고 있는 대한극장이지만, 지난날의 추억을 위해서라도 대한극장이 그 자리에 오래오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