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익은 자의 상담기 - 2
책을 읽으면서 내가 때때로 두려워질 때가 있다. 이제 나름대로 배경지식도 쌓여가고 읽은 텍스트 간의 유기성이 보여 인풋 쌓기에 가속도가 붙는 요즘인데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오만해지려는 자아를 발견하곤 한다. 이를 테면 'oo소설은 인기는 많지만 내용이 가벼울 것 같아.' 와 같이 내가 직접 접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얄팍한 지식으로 판단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단정 짓기'가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는 그 대상에 대해 문을 닫아버려 갇혔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된다. 또 두려워지는 모습 중 하나가 정량적 집적 행위에 대한 경계성이다. 학창 시절동안 정량적 집적 행위에 너무 진절머리가 난 것인지, 정성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우월감으로 번져버린 것인지. 아무튼 여러모로 조금은 어딘가 어긋나버린 나의 집적 과정을 교수님과의 상담 때에 털어놓으며 이대로 계속 갔으면 위태로웠을 나를 간신히 마주했다.
아래는 교수님들께 드린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갈무리하여 정리한 것이다.
1. 근자감인지 모르겠지만 인문학(문과의 학문)의 힘을 믿고 나는 타인과 다를 것이고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학을 알아갈수록, 철학을 알아갈수록 이 세상의 기반이 되고 통찰력을 안겨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 근자감 맞다. 아직 이렇게 판단을 내리기에 접한 것이 너무 얕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자칫 우월감으로 뻗어나가지 않도록 경계할 것. (교수님은 내 질문이 거의 끝나기도 전에 근자감 때문이 맞다고 말하셨다.)
2. 좋아하는 게 너무 많다. 근데 내가 생각하기에 잘하는건 한정적이다. 글쓰기와 분석, 수학 그런 것들일 것 같은데 좋아하는 것이 너무 많아 혼란스럽다.
→ 이 시기에는 원래 그렇다. 무슨 책을 읽으면 흥미 가는게 또 바뀌고 그런거다. 그렇게 바뀌면서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남는게 있다.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관찰해보도록.
3. 무언가를 할 때마다 내가 바라는 지향점(이를 테면 직업)에 맞춰서 검열하는게 맞나? 그냥 하고싶은대로 하다보면 그 흐름이 생기는게 아닐까?
→ 이건 그 지향점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만약 내가 하려는게 로스쿨이라면 진짜 공부만 해야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다양한 체험을 요하기보단 정량적 평가, 성적이 중요하니까. 근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그런 성격이 아닌 것 같다. 다양하게 경험하고 느끼고 네트워크를 만드는게 더 낫다. 누군가는 정량적인 무언가를 향해 달려갈 수도 있는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타인과 비교한다는 게 의미 없다. 나를 향한 타인의 말도 무시하지는 말되, 과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도록.
4. 오랫동안 나를 봐온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나를 좋게 평가해주고 내가 생각하는 가능성 이상으로 나를 바라봐주는데 나를 처음 보는 사람, 즉 기업 입사와 같은 경우엔 이런게 잘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나는 정성적인 것에 강한 것 같고 정량적인 것에 약하다.
→ 전략적으로 나를 어떻게 보여줄지 생각해야 한다. 인사 담당자가 주의 깊게 보는 포인트는 정량적인 것과 정성적인 것의 구분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나의 경험이 얼마나 '설득력'있는가의 여부다. 단순히 글을 잘 쓴다고 어필하는 것과 어딘가에 기고해본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전략적으로 나의 능력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나에게만 해당되지 않을 것 같은 질문만 모아서 정리하였다. 그래도 교수님들이 냉철하게 말해주시면서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황과 고민이 나에게 큰 강점이 될 거라고 말해주셨다. 늘 그랬듯이, 머리가 지끈 거릴 정도로 고민하던 시간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고 그 고민의 과정에서 접한 수많은 것들은 나중에 어떻게든 활용이 되더라. (활용이 안된다고 해서 쓸모 없는 시간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리고 책 <공부의 위로, 곽아람>과 <리추얼의 종말, 한병철>을 읽으면서 '정량적 집적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서양미술사 입문 수업을 듣던 대학 2학년의 나는 작품의 맥락이며 역사적 의미 같은 걸 깊이 이해할 새도 없이 굶주린 새끼 짐승이 어미 젖을 빨듯 무조건 외워버렸다. 그떄의 나는 '이런 암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냉소했지만, 나이가 드니 삶의 어느 순간 옛 생각이 나면서 '그때 그 작품이 이런 의미였겠구나.'하고 이해되는 경험과 깨달음의 기쁨이 종종 찾아온다. 누군가는 '암기'를 '절반의 앎'이라며 비웃지만, 그 절반의 앎이 시작되지 않으면 완전한 앎이란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 공부의 위로, 곽아람. 131p
오늘날 외우기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반복은 창조성, 혁신 등을 억누른다는 이유로 저지된다. '외우기'를 뜻하는 프랑스어는 'apprendre par coeur' (직역하면 '심장으로 배우기'-옮긴이)다. 오직 반복되는 것만 명백히 심장에 도달한다.
- 리추얼의 종말, 한병철. 17p
내가 정확히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과정에서의 의미는 생략한 채 떠돌아다니는 여러 결과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의미는 이후에 발현되기도 하기에 정확히 모든 과정에서 의미가 있다고 대응시킬 수 있나 싶기는 하다.) 하나의 수단처럼 여겨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했던 것 같은데 두 책을 읽으며 무언가를 반복하는 것 혹은 주입하는 것이 단단한 뼈대를 만드는 행위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원래 공부의 첫 시작도 늘 재미없지 않나. 응용단계로 넘어가면서 재미가 붙는데 개념을 모르면 응용을 하지 못한다. 인생에도 개념과 응용이 있다면, 지금 나는 개념을 쌓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나에게 담긴 것들이 앞으로 어떻게 응용될지 한 치 앞도 모르겠다. 인생에는 기출문제도 없어서 미리 엿볼 수도 없다. 누가 출제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인생 기출문제 사이트가 있는건 아닐까?) 개념과 응용의 명확한 구분도 없고, 언제까지 개념을 쌓아햐 하는지도 모르는게 인생 공부라지만 아주 조금씩 어제보다 나아지고 있는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