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어버리다.

쿠크다스 같은 내가 부끄러워지는 날.

by 하루를담다

"왜 술을 마셔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잊기 위해서야" 술 취한 사람이 대답했다.

"뭘 잊고 싶은데요?" 벌써 술 취한 사람이 불쌍해진 어린 왕자가 물었다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야" 고개를 숙이며 술 취한 사람이 털어놓았다.

"뭐가 부끄러운데요?" 그를 돕고 싶었던 어린 왕자가 물었다.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술 취한 사람은 계속 침묵했다. 난처해진 어린 왕자는 그곳을 떠났다.

"어른들은 정말 너무너무 이상해"라고 생각하며.

<어린왕자/생택쥐베리/민음사>


세상에 자꾸 부딪힌다. 깨어질 듯 연약한 마음을 타고난 나는 타인의 작은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에도 스스로를 으스러뜨릴 때가 많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내게 저런 행동을 하지?' 무의미한 행동에도 나는 스스로의 결점 찾기에 매진한다. 엄마 탓, 언니 탓, 아빠 탓도 해보았지만 그 칼날은 항상 나를 찌르고 나서야 끝이 난다. 그게 내겐 더 편한 길다. 생각을 해보니 나는 늘 배려를 하려고 사는 것만 같다. 내가 피곤하고 힘들어도 일단은 타인이 먼저다. 그래도 마흔이라는 나이를 먹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배려를 당연시하는 사람에게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건데 그 다짐 외에는 웬만해선 타인을 위해 내 시간을 맞추거나 사용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런 내게 느닷없이 번아웃이 찾아왔다. 6시 기상 후 운동. 커피공부. 지인과의 만남. 급식. 캘리. 타로. 문화기획자수업. 육아. 공부. 살림등 빠듯한 일상의 시간들을 쪼개 쓰며 헐떡거리는 내가 인지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던것 같다. 이유 모를 공허함과 허무함이 밀려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이 모든 일들은 나를 위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정작 나는 나를 챙기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듯했다. 지식의 배움은 가득 찼는데 웬일인지 마음이 공허하고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3월부터 도서관에서 타로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재미로 지인의 운을 점칠 때였다. 친한 언니들은 유순하고 항상 즐겁기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지만 우연한 기회로 자신만을 맞춰주길 바라는 50대 언니의 타로점을 보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언니와 비슷한 성격의 언니 친구와 함께였던 자리에서 나는 그만 주눅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존재만으로 공간을 불편한 기운으로 가득 채워버린 언니들은 이내 나의 연약한 마음속도 장악해 버렸다. '어디 한 번 맞춰봐'라는 눈빛읽히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내가 낯을 가리는구나.' '불편해하는구나'의 감정을 넘어 참담해졌다. 뒤에서 말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좋은 말을 고르고 있는 내 모습을 의식하자 문득 스스로가 측은해지기도 했다. 척박한 땅에서 보석을 찾듯 희망적인 말들을 골라 집어내느라 진땀 흘리는 작은 내가 보였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왜 있는 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걸까?' 그 와중에 당황한 내 모습이 들킬까 걱정스러웠고 이미 내 마음이 들켜 그녀들을 자만에 빠지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과장된 하다보니 내 멘탈은 안드로메다로 사라져 버렸다.


"타인에게 상처주기 싫은 마음"

인간관계속에 포함된 나는 항상 이 마음뿐이다. 나 자신이 작은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 작은 배려기도 다. 내가 상대의 마음까지 좌지우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만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건한 다짐이다. 것들은 내영역이 아님을, 아마도 내가 받는 상처는 생각지도 못하면서 순한 맛으로 살고자 하는 내 기대와 바람 그리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가 누구가 되었든 인에겐 따스한 말들을 골라내느라 스스로를 긁어대며 눈치를 살피는 내 모습 알아채자 비겁하고 부끄러워졌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나의 예민함은 원만해지기는커녕 모나고 각져 흉기가 되어 나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그냥 화가 났다. 둥글어지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변한 것 없는 여전한 나를 보니 속상했다. 그간의 노력들은 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걸까? 새것이 되고 싶었는데 항상 나는 그냥 제자리였다.


그 젊은이는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기 고유의 걸음걸이 마저 잊어버려 나중에는 기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최진석. 북루댄스>


사회에서의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해명하고, 알려주느라 참 바쁘다. 1년 전, 2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상대가 궁금해하지도 않은 것을 자기 기준으로 오해할까 봐 나를 잃어버리는 줄도 모르고 쳐대고 다녔다.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손을 댄 것이었다. 나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이 아닌데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과,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또 다른 실수를 불러일으 더 그 자리에 나를 머물 수밖에 없게 했다. 예민함에 강박증과 완벽주의자 성향이 더해진 번아웃이다. 내 아이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물려주고픈 마음에 고군분투하다 마음의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버려 꼼짝할 수 없는 지경에 다른것다. 예전처럼 다시 안으로 들어가 나오고 싶지가 않았다. 바깥세상은 내겐 너무 시린 겨울이었다. 나 자신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내겐 참 어려운 일이다. 가난의 대물림을 가장 두려워하는 나는 내가 변하지 않으면 내 아이들과 신랑 그리고 내 삶이 너무 위태로워질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삶들이 그 누구보다 더실했다. 내 삶의 원천은 두려움이었다. 외적인 가난보다 내적인 가난이 더 힘겹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 보호막이 벗겨진 느낌이 들 때마다 마음의 연약함 탓을 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괜스레 미운 엄마를 소환해 본다. 원망을해볼까? 말까? 고민한다. 참 부질없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갑각류는 탈피를 통해 성장한다고 한다. 허물을 벗는 순간은 가장 말랑말랑하고 상처받기 쉽지만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그 순간이라고 했다. 경험하고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겹고 버거운 일이다. 나의 나약함을 탓하다 도저히 답이 없어질 때쯤 되면 최진석 교수님의 말씀을 나지막이 떠올려본다. "원하는 것이 분명하면 된다. 모든 것을 흡수할 만큼 내가 커지면 된다. 과거의 나에게 머물러 있지 않으면 된다.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보여주는 내가 아닌 내가 아는 내가 되면 된다. 예전처럼 핑계 대며 도망가지 않으면 된다. 내 세상과 함께 나아가면 된다. 그곳에서 내 중심을 지키면 된다."


속상함과 무기력함이 나를 지배했던 오늘. 내 마음속 문을 굳게 닫고 close 간판을 내건 순간 내 휴대폰이 나를 가만히 있게 두질 않는다. 카톡도, 좋은 글귀도, 문고리에 걸린 빵들도 참 새삼스럽다. 외부활동을 한 지 4년째. 42세의 삶을 살고 있지만 실제나이는 4살에 불과한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내 주변은 이렇게나 많이도 변했구나 싶다. '지인하나 없던 내게 감사한 일이 참 많이 있었 구나.'가진 앙꼬가 작은 못난 나 그대로 수용하라고 이야기해주는 이들이 생겼는 사실이 신기하기만하다. 제자리인줄만 알았는데 작은 걸음이라도 나아가고 있었것일까. "금의 너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네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어"라는 따뜻한 호의들을 받을 만큼 내가 괜찮은 사람이었던가? 의심이라는 것을 해본다. 일단 오늘은 그렇다고 쳐야겠다. 하지만 수용이라는 것은 나에겐 더없이 어려운 일이라 말주고 싶다. 나는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 내 안의 그것들을 극복해서 더 단단하고 큰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친김에 욕심을 부려 겸손한 것과 나를 낮추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도 싶다 말한다. 나를 잃버린 밤. 오늘 따라 밤이 유난히도다.



진정한 자유는 그 속에 감춰진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 무한한 삶의 지평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자신의 권리에 익숙해져야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동등한 권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웨인다이어/스몰빅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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