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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Feb 26. 2022

내가 세상을 살아온 방식

나 스스로를 옭아맨 나쁜 습관

바닷가가 가까운 곳에 사는 터라 남녀 불문하고 말투부터 거친 이들이 많은 곳에 살고 있다.

생업이 어업과 가까운 사람들도 많고 이 또래이면서 같은 동네라면 한집 걸러 한집은 부모님이 어업에 종사하셨거나 아직 현역이신 분들도 있다. 그렇기에 내가 사는 곳의 사람들의 성향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만했었다.

투덜대는것은 강해 보이려고 하는 것이고, 일단 강하고 세게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며,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하며,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만만하게 본다고,

이곳 사람들은 식당이든 어느 곳이든 손님에게 불친절하게 기선제압을 하는 경우가 많고,

친절한 곳에서도 나 스스로가 기선제압을 해야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공격을 하면 절대 당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우습게 보이면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이곳에 살면서 머릿속에 내가 나를 스스로 옭아맨 생각들 중 일부이다.

이것 또한 내가 겪었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속에서 지어낸 편견이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동안 내가 처해있던 환경이 그랬던 것일 뿐이었다.

그 환경이 전체라고 생각하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나를 지키기 위한 길이라고 단정 지었었다.

저항하고 피하는 길이었다. 그건 나를 지키는 게 아니었다. 나를 더 가두는 길이었다.  

아이를 키워보니 어린 시절 환경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시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갓 이사를 온 친구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였다. 친구는 이 동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한 분위기를 풍겼고 부모님 두분도 아이를 사랑으로 대하는 말쑥한 분들이셨던 기억이 있다. 슈퍼를 지나가는 도중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동네슈퍼 이모의 딸이 올망졸망 귀엽다며 우리를 불러 세웠다. 곧 미숫가루를 준다고 하시고는 테이블에 앉으라고 했다. 의아했다. 나에게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던 호의였다. 친구 덕분이라는 것도 알았다. 집에 가도 간식조차 없었던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곧 이모가 부엌에서 미숫가루를 가져왔고, 친구에게는 옷차림과 어울릴만한 이쁜 유리그릇에, 나에게는 투박한 쇠그릇에 공평하게 나누어 주셨다. 양은 아주 공평했다. 그렇지만 그릇은 공평하지 않았다. 너무 창피했고 서러웠고, 거지가 된 기분이었다. 왜 우리 집은 가난해서 이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나. 엄마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걸 먹지 않으면 내 가난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아 도망치지 못했다. 어른들이 베푸는 호의를 무시하는 아이는 나쁜 아이였다. 자존심 상했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한척하며 마셨다. 어린 마음에 어찌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이 나이가 되어도 당시 공기의 흐름까지 잊히지 않았다. 이 기억은 내가 아이를 낳은 뒤 열심히 살아내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내 아이에게는 돌려주기 싫었다. 또 다른 차별을 낳는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그때 그 친구가 내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난 뒤 그 사실을 엄마에게 이야기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다. 달콤하지만 서러움에 북받친 미숫가루의 진득한 목 넘김이 어제 일처럼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아빠는 배를 타시니 잘 없었고, 어쩌다 오시면 늘 취해계셨기에 동네슈퍼에서 싸우기도 하고 집에서도 엄마와 다투어 함께 도망 나오기 일쑤였다. 가끔 엄마를 죽일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된 적도 있었다. 그럴 때 어린 나는 놀란 마음에 살려달라고 윗집 아랫집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다툼이 잠잠해지게 되면 엄마는 무서워하던 나를 달래기보다 오히려 '창피하게 왜 이 집 저 집 다니냐'라고 나무랐다. 나도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게 죽을 만큼 창피했다. 그런데도 늘 엄마가 죽을까 봐 무서웠다. 엄마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하는 부부싸움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내가 겁먹어서 하는 행동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엄마에겐 어린 나를 달래줄 마음의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무서워하는 것도 나에겐 사치였다.

가정환경도 좋지 않고 집도 가난했던 아이.  그러니 나를 어찌 만만하게 보지 않았을까.

그래도 나는 여기 살아야 했고 학교도 가야 했다. 그게 더 서러웠다. 집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처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안 괜찮은데도 괜찮은 척 살아야만 했던 어린 시절의 환경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엄마는 새벽같이 일을 가시니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르셨다. 퇴근하는 엄마를 보자마자 서러움이 밀려오는 일이 많았다. 주로 설움 받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엄마는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었다. 엄마도 사는 게 힘드니 약한 체력에 고된 일을 하고 엄마 몸 하나 간수하는 것도 피곤하고 힘들어하셨던 것 같다.

늘 '그냥 어른들이 스치듯 하는 말인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하냐' '왜 그렇게 생각하냐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  네가 예민하고 이상한 거라' 했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이상한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상하지 않다는 증명 하려 했고 나를 설명하고 해명했으며 더 나아가 변명까지 했다. 믿어주었으면 하는데 엄마는 내 말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리곤 결론을 내렸다. 결론은 늘 내가 예민하고 이상하다고 했다. 이해받고 공감받고 싶은 욕심에 다음엔 더 강하게 이 다음은 거짓말도 보태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거나 내 탓으로 돌아갔다. 이 방법도 먹히지 않았다. 한 가지 결론밖에 없었다.  

"엄마는 내편이 아니고 어떤 상황이 와도 나를 지켜주지 않을 사람이구나."


그러다 보니 이렇게 무시당하고 가만있지 않겠다 다짐하며 언니처럼 강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곧 잘 따라 했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언니와 나는 우리의 방법이 잘못되었을지언정 어린 나이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해법이라 생각했다.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했던 생존 욕구에 가까웠다.


엄마는 우리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아빠가 술에 취해 아저씨들과 다툼이 생길 때면 언니를 보내 사건을 해결시켰다. 나보다 고작 4살 많은 언니는 본의 아니게 아빠의 싸움에 휘말려서 어른들이 보기에는 못 배워먹은 버릇없는 나쁜 애가 되어있었고, 언니 스스로는 '우리 집은 내가 지킨다'는 영웅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린 나이에 희생양이 된 언니는 나약하고 피해 다니는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떨치지 못하고 오늘까지도 그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엄마가 하기 싫은 일' '나는 못한다'며 숨는 일을 대신했다. 안타깝게도 와중에 언니와 나의 경쟁심리까지 발동했다. 더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서로 앞다투어 원하는 것을 해주다 보니 엄마는 가면 갈수록 더 나약한 사람이 되었고, 타인에게는 한없이 좋은 사람이 되어 있었으며, 언니와 나에게는 더없이 차갑고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막 같이 화를 내고 싸워야만 내가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당하면 바보라고. 그걸 그냥 지켜보았냐고. 얼른 본때를 보여주지 않고 뭐하냐고.. 네가 나 대신 이야기하라고. 내가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네가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엄마의 눈빛에서 나오는 그 마음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 외침이 귓전에서 윙윙 돌아 내입 밖으로 꺼내어야만 엄마에게 인정받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될 것만 같았다. 이 무서운 기억이 나를 통째로 삼켰다. 무슨 일이든 상대의 의중을 궁금해했고,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는데 간접적인 행동이나 눈빛을 통해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보니 생각 없이 하는 말들조차도 빙빙 돌려 나를 깎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편집증적 성격에 자격지심도 심했다.


다툼이 생길 것 같으면 내 속에서 어린 시절 그때의 엄마가 나타나 내 머릿속을 진두지휘한다.

나는 그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참으면 바보니까 일단 내뱉는다.

잠깐 이긴 것 같아서 속이 시원하다.

그러다 뒤돌아서는 순간 무조건 후회한다.

내가 왜 그랬지. 무식해 보이지 않았을까.

나는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금방 그 사람은 누구였지.

이런 내 모습을 알지 못하는 직장동료나 아는 사람이 본건 아닐까. 두렵고 창피하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면 어쩌지.

혹시 길 가다 마주치진 않겠지? 마주칠 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조금만 참을걸 그랬나. 아니야 안 그러면 날 무시해.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학습되어 습관화된 행동들이 첫아이를 키울 때까지 계속 반복되어 나를 괴롭혔다




내 마음속 해결되지 않는 미흡한 부분을 엄마 탓으로 돌린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경험의 해석조차도 내가 스스로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기억이라는 것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것 또한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똑같은 상황도 다들 나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타고난 성격. 성향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거기에 주변 환경까지 더한다면 문제를 대하거나 해결하는 방식도 각자가 모두 많이 다를 것이다. 언니와 나처럼 말이다.


어느 날이다.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었다.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배운 대로 싸우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싸움이 아니라도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였다) 나는 언니의 편이었다. 순간 언니의 손이 떨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언니도 무섭구나...' 강했던 언니에게서 인간미가 느껴졌다. 진심으로 안쓰러움을 느꼈다. 어린 나이에 짊어지고 간 짐이 아직까지도 엄마보다 많은 사람이다. 나는 엄마에게서 거의 벗어났지만 언니는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엄마는 언니 뒤에서 언니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낱낱이 내 마음을 글로 풀어내어 쓸 수 있는 대범한(?) 나의 모습보다 서랍 속에 이것저것 엉클어 담고 못본 척, 아닌 척, 괜찮은 척, 참고 있는 언니가 나보다 더 연약해 보이는 건 왜일까.


그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속상했겠네. 왜 우리 딸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신경 쓰지 마. 일이 커지면 그땐 엄마가 가만 안 있어"

티브이 속에 나오는 엄마들처럼 나를 안아주었다면...

그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렇게 두서없이 막무가내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덤비지 않았을 것만 같다.


우리 아이들 눈에 비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어떨까?

나의 기준으로만 완전하게 자리 잡은 내 삶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나는 또 어떤가.

여전히 쌀쌀맞은 사람을 보면 나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아침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겠지.'

'사는 게 고단하신가 보다.'

'상처가 많으신 분이네.'

생각하며 그냥 넘어가지 않고

같이 투덜대고 있지는 않은가.


'저분이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 먹자' 하며 아이를 토닥거리며 유연하게 넘길 여유가 지금 과연 나에게는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지금의 나를 깨부수고 처음 살아가는 것처럼 다시 시작해야만 닿을 수 있는 마음일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삶을 변화시키려면 그때까지 살아온 햇수의 절반'이 필요하다는 말도 있네.

즉 마흔 살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면 20년을 더해서 예순 살이 되어야 하고 스무 살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면 10년을 더해서 서른 살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자네는 아직 젊어 그만큼 인생의 빠른 시기에 배우고 빨리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네 빨리 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네는 세상의 어른들보다 앞서고 있네. 자신을 바꾸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의미에서 나보다 앞서가고 있어. 길을 잃어도 좋고 헤매어도 좋아. 수직관계에 종속되지 말고,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 말고, 자유롭게 앞으로 나가게. 만약 모든 어른이 '젊은 사람들이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세계는 크게 달라질 걸세. 미움받을 용기/기시미이치로/인플루앤셜


늘 정신을 차리고 진실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니 그래야 해야만 한다.

과거의 습관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박혀있는 못된 습관이 불쑥 튀어나오지 않도록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곤하지 않도록 굉장히 애를 써야만 한다.

미니멀하게 살고 싶은 욕심도 이 마음가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어디든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

적어도 '내가 아닌 상대방은 적이다'라는 시선으로는 세상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나처럼 세상은 사사건건 브레이크가 걸리는 곳이 아니라는 것임을.

사람들의 겉모습과 언변을 통해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진심을 보기를.

사소한 곳에서 상처를 받기보다 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을 내는 사람이 되기를.

그런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만 해도 어느곳에서 무슨일을 하든지 감사하고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될 것 이라고.


"우리 마을에서 숙박업을 하는 집들인데 빈방이 없답니다. 우리 집에 갑시다!"

"그게.. 그러니까..."

우리는 초대 고맙다. 그러나 미안하다를 반복하며 도망치듯 사내와 멀어진다. 무엇이 우리 가족으로 하여금 한 사람의 호의를 의심하게 만들었을까.. 처음 보는 우리에게 숙소를 찾아주려 동분서주하는 사내의 모습을 가족 모두가 보았다. 빈방이 없다는 안타까움에 자기 집으로 초대하려는 그의 마음도 보았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보다 잘못된 지식에서 오는 불안이 더 컸다. 지식을 알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있다면 모르는 것보다 더 못한 일이다. 우리 가족 모두는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빼빼 가족, 버스 몰고 세계여행/ 빼빼 가족/ 북로그컴퍼니


길에 걸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눈으로 아이들의 행색을 훑어본다. 그러다가 1초 만에 얼른 정신 차린다.

절대 겉모습으로 아이들을 보지 말자 다짐한다. 아직도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에 혹시나 내가 편견을 가질까 봐 조심 또 조심한다.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환경이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본질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말이 거칠다고, 행동이 거칠다고, 그 아이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의 진심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어른들의 진심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그런 곳이 내가 살고 싶고 살아가고 싶은 세상이다. 그러니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시작해야 한다.

내가 나 스스로 철창을 치고 나오지 못한다면, 그 어떤 곳도 감옥이지만 그 감옥의 열쇠 또한 내가 쥐고 있다.

내 손으로 그 열쇠를 돌려 스스로 문 열고 나온다면 그동안 나를 옭아매었던 나쁜 습관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 그곳은 내가 그동안 알고 지냈던 가시밭길이 아니라 꽃밭이 아닐까.

오늘도 내 아이에게 해줄 말을 마음속으로 되뇐다.

"속상했겠네. 왜 우리 딸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신경 쓰지 마. 일이 커지면 그땐 엄마가 가만 안 있어"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뜻이지. 이는 오랫동안 근시였던 사람이 처음 안경을 썼을 때 받는 충격과 비슷하네. 어렴풋했던 세계가 또렷하게 보이고 색채마저도 선명해지지. 게다가 시야의 일부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세계가 전부 깨끗해지지. 나는 자네가 이와 같은 체험을 하기를 간절히 바라네.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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