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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Nov 19. 2024

매력적인 청파동 골목길 산책

얼마 전 남편이 일로 충정로 쪽 프랑스 식당과 이탈리아 식당에 가봤는데 특이하고 가성비도 좋다고 해서 다녀왔다. 개발되지 않아서 그런지 동네의 독특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성수동이나 연남동 같은 상업화가 되기 전이라 허름하긴 했지만 정겨웠다.


나중에 이 근처에 다시 와봐야지 생각하며 검색을 해봤더니 청파동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충정로 쪽보다 더 관심이 갔다. 올 가을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지만 반코트를 입고 걸어 다니기에 상쾌하고 좋았다.


청파동 가는 길을 검색해 봤더니 집에서도 가까웠다. 4호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15번 출구로 나가서 길만 건너면 그쪽 일대가 다 청파동이었다. 15번 출구 쪽은 KTX 타는 방향과 같았다. 점심시간이라 기차역에서 혼자 칼국수 만두 세트를 사 먹고 15번 출구 서부역 쪽으로 나갔다.


따뜻한 국물을 먹어서인지 전혀 춥지 않고 부른 배를 꺼트리며 걷기에 최적의 상태였다. 길을 건너자마자 빨간색의 국립극장이 나왔다. 국립극단과 주유소 사이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자 길 하나 건넜는데 다른 시간대에 온 거 같은 착각이 들만큼 오래되고 개성 있는 주택들이 나타났다.


청파동 골목길은 기대 이상이었다. 작고 오래된 귀여운 집들이 아주 아주 많았다. 여긴 아직 카페나 식당, 소품샵 같은 상업적인 것들의 물결에 점령당하기 전이라 진짜 7, 80년대에 멈춰있었다.


아주 어릴 때 할머니 손잡고 방문했던 친척의 작고 낮은 집과 닮은 집들이 많았다. 너무 어릴 때라 꿈을 꾼 건지 직접 방문했던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는데 여기에 오니 그게 사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반복해서 기억하던 집을 실제로 보는 거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북촌 마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한옥도 아니고 7,80년대에 아니 더 오래전에 지어졌을지도 모르는 개성 넘치는 집들과 옆의 작은 계단들, 너무 예뻐서 사진 찍으며 “아 귀여워”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진짜 서울 토박이들이 살 거 같았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이런 동네들이 사라지기 전에 부지런히 다니고 사진 찍고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서 마음이 분주해졌다.


초입에 있던 개미슈퍼도 얼마나 예쁘던지! 빨간 페인트로 칠한 작은 집이 동화에 나올 듯 보였다.

개미슈퍼


조금 더 가서 만난 파란 지붕 집은 청파동이라는 이름과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얼마나 독특하고 예쁜지 나중에 보니 그 집 사진만 9장을 찍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들이 사랑스러워서 보고 있는 내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제일 맘에 들었던 파란 지붕집


또 걸어가다 만난 파란 대문집도 담쟁이가 푸르러질 봄이나 여름에 다시 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담쟁이가 가득 피어난 때가 궁금해지는 파란대문집



작은 골목 사이로 보이는 은행나무가 이곳의 명물인지 표지판까지 만들어 달아 놨는데 아주 작은 골목 사이로 보이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의 풍경도 근사했다.

은행나무집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골목길 언덕을 오르고 또 나타나는 옆 골목으로 가다 보니 저 멀리 빌딩 사이로 남산타워가 보이고 서부역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이 보이는 집들은 또 얼마나 멋지던지 이곳의 사계절이 궁금해졌다.

남산타워와 기차가 작게 보이는 풍경


걸어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 주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독특한 집들이 많았다. 특이한 모양의 대문과 담벼락을 갖은 집도 멋졌고 빨간 대문의 목조건물집도 예뻤다.

실제로 보면 아주 귀여운집


청파동에는 지금까지 가본 주택가 중 가장 특이한 집들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컸다. 내가 사는 아파트 뒤쪽으로도 오래된 집들이 많은데 거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빨간 벽돌집이 대부분이어서 집 하나하나를 살펴볼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오래된 서울 주택가가 그럴 것이다.


그렇게 집들을 한참 구경하고 사진 찍고 다시 큰길로 나와 계속 걸었다. 길가의 가로수와 나무들 모두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덥고 단풍이 너무 늦게 든다고 불평했었던 거 같은데 완연한 늦가을의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서울 한 복판의 옛날 골목길과 거리들을 걸으며 그 옆에 서있는 가로수와 나무들의 나이를 가늠해 보며 이상하고 신비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난 이렇게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를 살고 점점 늙어가기만 하는데 나무는 매년 새 옷을 갈아입고 싱싱하고 더욱 늠름한 자태로 서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얼마 전 인천에서 800년이 된 은행나무도 보고 왔는데 늙었다는 느낌보다는 경이로운 그 위용에 감탄만 나왔다. 인간은 늙으면 작게 쪼그라드는데 나무는 저렇게 더 빛날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인천 장수동 800년 은행나무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숙대입구까지 왔다. 8천보 가까이 걸었더니 귀도 시리고 어깨 근육이 뭉쳐 아파오기 시작해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니 또다시 그때의 기분이 떠올라 얼른 메모하며 달콤한 라테를 마시니 너무 행복했다.


청파동! 이름도 예쁜 이곳에 오길 잘했다. 기대 이상으로 볼 것이 많고 예뻤다. 오래전 기억의 씨앗을 찾아 그것을 확장시킬 수 있는 장소에 찾아가 보는 일이 좋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기억이든 상상이든 그걸 이리저리 따라다니며 거기에서 빛나는 것을 찾아내고 덧붙여 새롭게 탄생시키는 일이 재미있다.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에서만 살다 이런 특별한 외관의 집들을 보니 좋았다. 살기에는 불편할 수도 있지만 감성은 가득 채워질 거 같다. 이 골목을 돌아 나가면 어떤 곳이 나타날지 가늠도 되지 않은 길들 과 작은 계단을 매일 오르내리면 어떤 기분일까? 그게 내 집이 되고 매일 다니면 무뎌지겠지만 그래도 회색의 건물덩어리 아파트에 사는 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일 거다.


주택에 살다 처음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가 기억난다. 아직 어렸는데도 집안에서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히는 그 느낌이 생생히 기억난다. 주택에 살 때는 답답하다는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나가서 강아지와 놀고 새장의 새와 작은 정원의 나무들을 보며 거닐 수 있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중요한 주거환경의 차이였다.


내 오래된 기억을 닮은 동네가 이렇게 아름답게 남아 있어서 너무 고맙다. 앞으로도 찾아다닐 골목길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게 나를 설레게 만든다. 아직 못 가본 서울의 동네들을 더 찾아보고 나중에는 지방에도 가보고 유럽에도 가면 또 얼마나 재밌을까? 관광지나 유명 유적지 보다 이런 길들을 걷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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