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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숭아 May 12. 2022

알코올 중독 아저씨가 인정한 보호자

친할머니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버스가 하루 2번 밖에 다니지 않는 경기도 북부 깊숙한 향촌에 살던 할머니는 막걸리에 밥을 말아 드셨다.


이틀 걸러 속이 깊은 양은 주전자 가리키며 막걸리를 ‘받아’ 오라 심부 있었다.  양조장으로 가 할머니 이름을 댔다.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초등생 키의 항아리에서 긴 국자로 휘휘 저어 걸쭉하고 진한 빛깔 막걸리를 주전자 꼭지 찰랑거리도록 부어주었다.     


심부름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맛보는 사골 진한 육수와 같은 풍미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첫 모금은 달고 진해 전혀 취기를 느낄 수 없다. 끈적끈적 입안을 감싸는 부드러움에 연달아 들이킬 수밖에 없는 그 맛!    

그러나 부드럽고 진한 막걸리는 생각보다 늦게 취했고 오래갔다. 그 맛 때문일까 할머니는 1년 365일 입에 달고 사셨다. 맨 정신을 가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할머니는 전형적인 주폭이었다. 맨 정신이 아니니 위생을 포함한 스스로 의식주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술에 술이 더해지니 물건 집어던지기, 소리지르기, 옷에 대소변 하기가 반복됬다.     


할머니와 같이 거주한 것은 아니지만 고1 때까지 주 7일 중 기본 2일과 방학 때는 내내 살았기에 할머니의 주폭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다.

밤 12시부터 달빛이 새벽녘에 아스라 질 때까지 할머니는 막걸리를 마시며 끊임없이 집어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질렀다.


그러다 지치고 잠이 오면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주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지내는 시간은 현저히 줄었다. 그 이후 할머니 주사를 본적은 거의 없었지만 2002년 84세 임종하실 때 신장망가지고 심장이 남들에 비해 2배가 되어 힘들게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약 2주 전 공고수 아저씨 행정 입원을 진행했다. 아저씨를 만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주기적인 상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눈에 띄게 술을 마시는 날과 양이 늘어났다. 아저씨는 고시원에서 혼자 살고 있는 1인 중장년 독거 생활자다. 가족들은 다년간주폭으로 곁에 없다.     

행정 입원은 2021년 대상자 및 지원범위가 확대되어 입원 및 치료비는 무료지만 공공기관(보건소, 정신보건센터 등)의 의뢰를 통해 진행되며 3개월 동안 폐쇄병동에서만 지내야 한다. 아저씨는 알콜성 치매로 CT에서는 뇌가 소실되어 있었고 통풍을 비롯해 생각보다 많은 지병을 앓고 계신다.     

아저씨에게 술 1병의 의미는 360ml가 아니다. 담금주 1.8L다. 병원 입원이 결정된 일주일 전부터 아저씨는 술을 한꺼번에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밥이고, 반찬이었다. 작정하고 마시는 술이었다. 그리고 입원 삼일 전부터는 눈 띄게 손을 떨고 계셨다. 환청과 환각증세도 나타났다.  

   

“며칠 전부터 꿈인지 생시인지 하얀 배경인데 사람들이 소주에 삼겹살을 먹으며 저를 부르더니 어제는 TV의 화면처럼 너무 많은 영상이 한꺼번에 올라와요.”     


단 1만 원도 없는 상황에서 입원 전 주머니 모든 돈을 끌어모아 술을 드신 아저씨는 몇 해전 주폭을 감당치 못한 가족들이 곁을 떠났다. 아저씨에게 남은 가족, 친척,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앞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 의식주 영위를 위해서 가족연락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가족 음성을 통해 내가 할머니에게 느꼈던 분노가 고스란히 투사되었다.     

TV에서나 보던 듣고 싶지 않던 가족의 힘든 상황을 전달하는 사람이 내가 되었다. 아저씨를 보며 할머니로 인해 우리 가족이 겪었던 공포와 그 힘듬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했다.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집어던지고 바지에 용변을 누는 건 할머니인데 그 모든 뒷수습과 감정 쓰레기통은 가족이었다.

    

그렇기에 가족들의 감정이 어떤지 충분히 와닿을 수밖에 없지만 지금 아저씨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아저씨는 입원 상담과정에서 보호자를 묻는 질문에 매우 당연하다는 듯 긴 검지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 걸린 책임감이 사회복지사로서 직업정신으로 돋아올랐다.     


행정 입원을 위해 건장한 남자 3명이 아저씨를 데리러 왔다. 좁은 엘리베이터에 4명의 남성이 꽉 찼다. 이제 3개월 후에나 보게 된다. 사라지는 아저씨를 보며 두 손을 흔들어 밝게 인사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도 모르게 울컥 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아저씨 가족들이 많이 힘들고 원망스럽대요. 아저씨 때문에 삶이 힘드셨대요. 그렇지만 저는 그 가족들의 마음이 너무 이해가 요. 지금이라도 아저씨 가족들을 위해 몸 잘 챙기셔야 해요. 저씨 3개월 후에 만날 때는 조금이라도 건강해져서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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