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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뿔 Mar 26. 2021

‘진정한 승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승리호〉에서 재현된 ‘장애’

* 이 글은 영화 ‘승리호’의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참고해 주세요.


[본 글은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에 기고되었습니다]


넷플릭스 화제작 〈승리호〉를 봤다. 한국 영화계에서 최초로 시도된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라는 수식어를 달기 충분한 구성이었다. 비록 깊이 다루지는 않지만, 중간중간에 난민이나 성별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점에서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각종 오염물질로 뒤덮인 서울, 그리고 UTS의 궤도 엘리베이터 정거장으로 향하는 태호(송중기)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흐린 공기로 오염된 지구와 대조되는, 푸른 숲이 울창한 ‘UTS 시민 거주 단지’를 소개하는 설리반 회장(리처드 아미티지)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며 첫 5분을 이끌어간다.     


환경오염에 관한 메시지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승리호>가 ‘장애’를 재현하는 방식을 중점적으로 짚고 싶다. 영화 속의 기술 수준은 노화된 신체를 인공장기로 대체하여 150살이 넘게 장수하고 나노봇을 몸에 심어 희귀질환을 치료할 수 있고, 의사소통에서도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통역기를 등장인물 대부분이 보유했을 만큼 첨단적이다.

이외에도 작품에 나온 다양한 미래 기술 중에서도 의료기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설리반 회장처럼 돈이 많거나 강현우 박사(김무열)처럼 지식 자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만큼 세계관 내부에서도 특이점에 도달한 기술을 이용하기란 쉽지가 않다. 결과적으로 고도로 발달한 의료기술은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 된다.


설리반 회장의 대사를 끌어오자면 ‘UTS 시민 거주 단지’는 이른바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사람만이 시민권을 얻어서 들어올 수 있는 청정구역이다. 그리고 부자만 골라서 데려온 것이 아니라, 좋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모았더니 부자였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개인의 도덕성까지 유전자 레벨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며, 그것을 토대로 시민을 선별하는 기준이 만들어진다고 덧붙인다. 영화를 보면서 ‘유전자’라는 단어가 참으로 거슬렸다. 아니나 다를까 UTS 시민 거주 단지에 ‘장애인’은 없다.





2092년에도 장애는 극복 아니면 불운?


<승리호> 전체를 봐도 ‘장애인’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는 순이(오지율)와 꽃님(박예린)뿐이다. 꽃님은 뇌신경이 파괴되는 원인 불명의 희귀질환을 가진 ‘뇌병변장애인’이다(물론 모든 뇌병변장애가 질환에 기인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인 강현우 박사가 개발한 나노봇을 몸에 주입받음으로써 치료된 꽃님은 다른 나노봇을 조종하거나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초능력을 얻게 된다. 설리반 회장은 자신의 화성 테라포밍1) 계획에 꽃님을 이용하려 했고 이에 동조하지 않은 강 박사는 UTS의 추적을 받는다.


마치 비장애인 사회에 ‘희망’을 던져주는 장애인의 서사처럼, 여기서 꽃님은 ‘쓸모’라는 기준 앞에서만 존재를 인정받는 ‘슈퍼 장애인’이다. 현실에서도 비장애중심적 사회는 희망과 감동을 주는 장애인의 존재만을 인정하곤 한다.  이는 쓸모가 사라지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음을 내포한다. 장애인을 언제든 배제할 준비가 된 ‘쓸모’의 기준은 누구의 관점에서 만들어지는지 따져 물어야 우리는 모든 삶과 살아갈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다음으로 태호의 수양딸 순이는 ‘청각장애인’이다. 순이가 청각장애를 갖게 된 이유는 UTS 기동대가 우주 난민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격음으로 인한 청력 기관의 손상이다. 작품 내에서 순이의 ‘청각장애’는 인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라기보다는 자본이 만들어낸 폭력의 참상을 보여주고 태호가 순이를 잃은 아픈 과거를 후회하게 하는 ‘불운’의 은유로 대상화된다. 이를 반영하듯 청각장애를 갖게 된 순이가 평생 발음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에 태호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이에게 태호가 실로폰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은, 태호의 부성애를 드러냄과 동시에 캐릭터의 청력을 언젠가 ‘정상적으로’ 되돌려 청인과 동일한 청력을 회복시키겠다는 치료 욕망을 보여준다. 이 욕망은 영화 설정과 어울리지 않는 의문을 남겼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언어로 소통하도록 돕는 통역기가 보급된 사회에서, 번역 가능한 언어 목록에 ‘수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어를 음성 언어로 전환하는 상상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통역 기술과 홀로그램 기술의 결합으로 충분히 재현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수어가 등장하지 않고, 치료 욕망으로 가득한 세계관에서 수어 통역 기술이 끼어들 틈은 없다. 순이에게 허락된 소통 방식은 ‘구화’뿐이다. 여지없이 태호가 쓴 글귀를 노래 가사로 ‘들어야’ 한다. 만약 태호가 순이와 수어를 함께 배우면서 소통 관계를 만들어가는 장면을 연출했더라면, 순이의 청각장애가 일방적인 불운으로 소비되지 않으면서도 태호가 순이를 기르면서 갖게 되는 애착의 감정을 관객에게 더 잘 전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승리호〉는 장애인에 대한 양극화된 편견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순이처럼 ‘불운’의 상징이 되거나, 과학기술의 힘으로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능력을 얻은 ‘슈퍼 장애인’이 되거나. 그것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가진 비장애인 중심의 장애 인식이 작품에 드러난 결과물이다.




‘진정한 승리’는 함께하려는 고민에서부터


‘현재’라는 시간 위에서 만들어지는 이상, 모든 예술작품에는 그 시대의 의식, 편견, 가치관 등이 담긴다. 그러나 여느 장르보다 새로운 상상력과 가능성의 발상이 요구되는 SF에는 더더욱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려 노력할 책임이 있다. 〈승리호〉의 세계와 실제 현실 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장애인의 신체를 비장애인의 신체로 바꿀 수 있는 의료기술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것을 제외하면 70년 차이가 나는 2021년과 2092년의 두 세계는 별반 다르지 않다.


〈승리호〉는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점에서 호평받을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최초’ 타이틀만으로 모든 지점이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화를 통해서, 적을 그저 깨부수거나, 대척점에 있는 이들을 무조건 제거하고 척결하기보다 “어떻게 같이 화합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싶었다는 조성희 감독의 취지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화합’을 논하고 싶다면 그에 앞서서 ‘어떻게 해야 모두의 삶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관하여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의 모습이 감춰지는 곳에서 ‘화합’을 이야기하겠다는 선언만큼이나 엉성하고 무력한 언어는 없다. 이 고민은 비단 〈승리호〉에만 요구되는 내용이 아니다. 특히나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는 SF 장르, 나아가 모든 영화에서 섬세하게 고려할 사항이다.


감독은 ‘승리’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무엇이 진짜 승리’인지 되물으려는 의도에서 우주선 이름과 영화 제목을 ‘승리호’로 지었다. 진정한 승리는 무엇인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가 다쳐야 하는 ‘제로섬 게임(zero-sum)’이 승리의 요건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모두가 함께 한 발짝 내딛는 과정 자체가 진정한 승리로 향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이는 ‘인권’과 닮았다. 누군가의 권리가 훼손되면 다른 이의 권리 역시 존중될 수 없으므로, 인권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연대’가 된다. 그것의 한 방식으로, 아무도 해치거나 상처 주지 않는 방법을 고민한 흔적이 드러나는 영화를 만들고,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이유로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승리호〉에서 말하려는 ‘진정한 승리’는 완성된다.





1) 테라포밍(terraforming) 또는 지구화(地球化)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및 위성 기타 천체의 환경을 지구의 대기 및 온도 생태계와 비슷하게 바꾸어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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