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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뿔 Mar 29. 2021

학교와 나 #1

학교가 갖는 (교육 제도 이전의) 의미


  초등학교 이후로 몇 년째 학교에 다니면서도 정작 학교가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떠올린 적은 없었다. 그저 남들―여기서 말하는 ‘남들’은 ‘비장애인 일반’의 의미이다―이 가는 ‘route’대로 따라갔다고 이야기하는 게 빠르다. 그리고 ‘학교’만을 딱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내가 학교에 다니는 일 하나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어서다. 다시 말해 ‘학교’에 관해 말하는 것은 내 삶 전체를 관통해야 설명할 수 있는 길고 지겨운 해설이다. TMI가 될 수 밖에 없다.


  어릴 적부터 학교는 내가 타인과 다른 신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유일하게 다른 비장애인 동창들과 그나마 대등하게 다툴 수단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만져지는 ‘실체’로 존재하는 내 몸이 아닌, 만져지지 않아도, 무엇보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타인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발견은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능성이자 자존감이었다. 도저히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는, 인정하기 싫은 몸이었기에 다른 무언가로부터 인정 욕구를 채우고 싶었는지 모른다. 전동휠체어를 탄 녀석의 시험 점수를 들은 사람들은 표정이 달라졌다. 그 낯빛은 ‘의외’라는 표정 같기도, ‘대단하다’고 말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묘한 표정 변화를 내심 즐겼다. 적어도 ‘쓸모’를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3개월마다 하루를 비우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 다녀오더라도 흔쾌히 노트를 빌려주는 친구들이 있어 내 존재 가치는 지켜질 수 있었다. 주기적인 병원 방문으로 개근상은 한 번도 못 탔지만. 이제 와서 떠올려보면 ‘쓸모’에 관한 집착이었다. 어떤 쓸모로써 사람이 존재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내가 살던 곳은 ‘읍’과 ‘면’이라는 행정 단위를 쓰는, 주변 대도시 사이에 낀 작은 도시였다. 같은 동네에서, 같은 친구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내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사춘기 소년소녀에게 ‘학교’와 ‘학원’이 단순한 교육기관 이상의 의미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두 장소는 동네 친구들이 모이는 거대한 커뮤니티였다. 그로부터 동네 여기저기로 커뮤니티가 퍼졌다. 동네가 좁았던 만큼 또래 커뮤니티는 촘촘하면서 두터웠고, ‘한번 동네 친구는 영원한 친구’로 남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알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커뮤니티에서 이탈하게 될 줄이야.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 겨우 이어낸 소박한 연결고리가 ‘학교’로 인해 끊어졌다.


  내 쓸모를 모두가 인정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내가 가려던 곳은 동네에 하나 있는 사립 고등학교였다. 외고와 같은 특목고로 가는 게 아닌 이상, 다른 친구들은 입학이 확실시되었다. 나 역시 당연히 그곳에 입학할 줄 알았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벽돌로 지은, 여러 동으로 나누어진 낡은 건물에서 장애인에게 필요한 편의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교육청을 통해서 항의하기도, 지역 장애인학부모회의 도움을 받아 학교 관계자들과 면담도 했다. 때는 벌써 11월, 서둘러 공사를 진행해도 입학예정일까지 편의 시설이 완공될 지도 불투명했다. 그런 와중에 해당 학교에서는, 내년에 공사 계획이 있으며 내후년에는 장애인 입학생을 받을 거라는 말만 반복했다. 리모델링이 완료되면 전학을 오라는 투의 헛소리도 했다. 다행히도 그 역겨운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거부’당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기분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듯, ‘학교 건물이 낡았다’라던가 ‘보도블록이 울퉁불퉁해 휠체어가 다니기 위험해 보였다’라는 말들로 괜히 화제를 돌렸다. 이 ‘좆같은’ 상황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멀어져야 하는 건 억울했다. 왜 그들이 마땅히 제공할 지원들을 내놓지 않고도,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치가 떨렸다. 어머니는 최선을 다했고 다만 그들이 나를 짓밟았을 뿐이다. 그때 처음으로 ‘학교’는 가장 잔혹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같은 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은 대신 화를 내주며 자신들이 집에 더 자주 놀러 오면 될 거라고 큰소리쳤지만, 어디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친구네 집에 놀러 다닐 시간이 있는가? 방학 주말 때나 아주 가끔 들러 얼굴 보는 게 전부였다.


  결과적으로 집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걸리는 옆 동네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국도를 지나가야 해서 아침이면 출근 시간에, 저녁이면 퇴근 시간에 시달렸다. 이렇게 작은 동네에도 차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주변 도시의 침상 도시 노릇을 하던 곳이라 더욱 막혔던 것 같다. 학교 주변은 논밭이었다. 봄이면 거름 냄새가 났다. 교실까지 들리는 경운기 소리는 덤이었다. 그것보다 문제는 새로운 커뮤니티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새 학기 첫날마다 나를 향하는 묘한 시선들이 신경 쓰여 선뜻 먼저 다가서기를 망설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에는 내 자존심이 도무지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입학 전에 겪은 치욕이 떠올라 “네 놈에게 안 가도 나는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의문의 복수심도 있었다.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부산에서 이 학교로 온 친구가 있었다. 구포 쪽에 사는 그 친구는 학업에 집중하고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형 학교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그에게 동질감을 느껴 금세 친해졌다. 그동안의 걱정은 정말이지 쓸데없었다. 고민의 무게보다 훨씬 싱겁게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교이다 보니, 통학하는 사람은 조금 어색해지는 경향이 있긴 했다. 그래도 나를 포함한 30% 정도의 통학러에게, 기숙사에서 있었던 간밤의 에피소드를 듣는 일은 소소한 재미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학원에서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에게 밀리지 않고 꽤 괜찮은 성적을 받아냈다. 그래도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긴 했다. 사교육을 받지 않은 건 순전히 내 의지만은 아니었다. 학원 건물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누군가의 등에 업혀 다니며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아낼 만큼 패기가 있지도 않았다. 그저 또래 사이에서 적당한 인정과 존중을 받으며, 친구들을 만나는 일상의 반복이 내 욕심의 전부였다.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피터팬처럼 안온한 일생을 꿈꿨다. ‘대학’은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고 미래는 너무나도 막연했다. 이 안전한 울타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공교육의 시간이 모두 끝나면 나의 삶도 끝날 것만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종결의 시간에 맞추어 내 삶도 끝나길 바랐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의 삶을 떠올리는 건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민들레 씨앗을 거두는 일처럼 막막했다. 시간을 멈출 수 없어 결국에는 나이를 먹어 버렸고,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다른 친구들이 떠나가는 상상을 하면 속이 메슥거리도록 두려웠다. 두려움 뒤편으로 시기심이 마구 피어올랐다. 지금 머무는 곳을 언제 떠나가도 아무렇지 않을 것만 같은 ‘준비된 자들’에게 샘이 났다.


  고3 생활을 앞두고 도저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에겐 이렇다 할 목표도 없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결국에는 떠날 운명이었다. 5월의 어느 날, 교정을 산책하다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 봄 공기를 가득 채운 오후 하늘빛은 찬란한 만다린 빛깔이었다.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아지랑이 봄볕이 등을 감쌌다.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무력하게 희망했다.

  애초에 피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할수록 괴로움은 커져갈 게 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하던 대로 책을 붙잡는 게 전부였다. 남들처럼 대학 입시 요강을 뒤적였고, 짧은 19년 인생을 억지로 쥐어짜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했다. 애써 찾아낸 목표는 ‘수능 최저기준’을 맞추는 것.1) 그게 전부였다. 구색 맞추기에 가까웠다. 그걸로 머릿속을 휘어 감은 무상감을 떨쳐내려 했다.

  욕심이 있어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목표가 생기니 그제야 욕심이 났다. ‘최저’는 지킬 수 있었고, 예상치 못한 합격 소식도 받았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마주하고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아직 얼떨떨한 상태에서 생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 문제는 내 뜻과 성취 결과만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현실’이라 불리는 어른의 문제가 끼어 있었다. 아마 다른 가족도 그렇겠지만 ‘대입(大入)’은 온 가족이 엮이는 큰 사건이다. 서울권 대학에 합격 발표가 난 이상, 최대한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내 평생이 걸린 중대 사항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놓치기 싫었다. 떠나기 싫다는 아이의 마음과 떠나야 한다는 어른의 마음이 부딪혔다. 아니 그 반대인가. 안정을 찾아가는 게 ‘어른스러운’ 행동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당시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부산에 있는 국립대로 가서 4년 전액 장학금을 받는 것. 다른 하나는 학자금 대출을 받고 서울권 대학으로 가는 것.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이사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부산이 갖는 이점은 주변에 사는 친척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활동지원사가 있어도 어머니가 지는 돌봄 노동의 몫이 남아 있었기에 이모나 할머니의 도움으로 그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집 안의 다른 여성 구성원에게 돌봄 노동이 분담될 수도 있는 이상한 제안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친정 식구를 자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운 내용이었다. 대신 자주 다니는 병원까지 걸리는 시간이 2시간 정도 더 늘어난다는 단점이 있다. 이 단점은 병증이 심화할 앞으로의 상황을 고려하면 위험한 변수였다.

  그러나 다른 것보다 집값에서 차이가 났으니 속으로는 걱정됐다. 솔직히 우리 집 형편에 ‘수도권 집 장만’이 가능한지 의문스러웠다. 어머니는 “돈 이야기는 네가 할 걱정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내 뜻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 표명이었다. 부모님은 인터넷으로 집을 적당히 알아본 뒤, 실사(實査)와 계약을 위해 하루를 비워야 하는 먼 거리를 세 번이나 오갔다.


  또다른 결정 사항은 ‘가족’이 걸린 일이었다. 내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다. 동생도 나와 같은 질환을 가졌다. 둘 다 익숙한 돌봄이 필요한 몸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멀리 울산에서 일하고 계셔서 사실상 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동생은 반강제로 나를 따라 전학을 가야하는 입장이었다. 여태 내 일로 인해 동생이 희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부분은 항상 동생에게 갖고 있는 미안함이다.

  동생도 내 수험번호를 알고 있어서 합격 결과를 나보다 먼저 보고 말았다. 결과를 확인하고는 ‘아뿔싸’하는 표정으로 나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동생은 웃을 수 없었다. 또 자신이 희생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왔을 것이다. 당연히 내 욕심이 원망스러웠을 테고. 갑자기 동생은 경제적인 이유를 대며 꼭 서울로 가야하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동생을 마구 몰아세울 처지는 아니었기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보다 낯을 가리는 성격인 동생에게 전학은 겪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을 거다. 나 역시 고민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터무니없이 먼 곳으로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이용하던 특수교육대상자 전형 카페2)에 고민을 털어놨다. 꼭 서울로 가라는 조언이 많았다. 국가장학금 제도도 잘 되어 있으니 걱정 말고 욕심부리라는 다른 학부모분의 댓글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어머니는 낯선 곳에 가더라도 틀림없이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동생을 다독였다.


  몸 붙인 곳을 떠난다는 의미는,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사람에게는 더 크게 다가온다. 몸으로 향하는 모든 낯섦을 다시 받아들여야 하고, 친밀함을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 자체가 피로하다. 휠체어 앞에서 멈추고 이내 사라지는 찜찜한 시선.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타인의 난처함. 다른 이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없다는 만성적인 무력감. 내가 마주한 ‘낯섦’의 다른 이름이다. 오래된 관계는 익숙함이 덧붙어 이 낯섦이 그나마 줄어든다. 모든 관계는 낯섦으로 시작해 그것이 풀어지는 경험을 동반하지만, 이왕이면 적게 겪고 싶었다. 실은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 내 몸을 설명하는 일에 지쳐 있었고 또 귀찮았다.

  내 몸에 알맞은 도움을 얻으려면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지만, 수없이 반복된 서술이 나를 ‘낯선 몸’으로 규정하고 경계 짓는 장벽처럼 느껴졌다. 이런 내 마음과 별개로 지인들이 나를 챙겨 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고맙기도 했고, 내가 존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 자신도 다 알지 못하는 나에 대한 주석을 늘어 놓는 건, 몸을 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 항상 체감하게 한다. 이 난처함과 귀찮음 사이에서 문장을 이어가야 나의 권리도 이어진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그나마 내 입을 열게 만든다. ‘학교’로 한정된 내 좁은 공간이 어떤 계기로 갑자기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되면, 내가 겪을 낯섦의 범위도 커진다. 그리고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해진다. 이 넓어진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나갈지는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1) 현재는 특교자(특수교육대상자) 전형에 '최저'가 없어지고, 모두 면접으로 바뀐 것으로 안다. 이 글은 5년 전 경험이 기준이라 그 사이에 여러 부분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2특교자 전형과 관련된 정보는 통상적인 입시 커뮤니티에서는 구할 수 없어서 전형 당사자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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