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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희 Jun 18. 2020

정 여사보다는 국두 엄마?

자식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어머니들

외국인 남자친구와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려면 영어 자막이 필수다. 감사하게도 넷플릭스에서 영어 자막을 지원해줘서 우리 커플은 별 지장 없이 한국 작품을 시청한다. 우리 커플은 최근에 [힘쎈여자 도봉순]을 정주행 했다.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봉순이와 민혁의 알콩달콩한 러브스토리에도 눈이 갔지만, 극 중 봉순이가 짝사랑한 국두와 '국두 엄마'의 관계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드라마를 시청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영어 자막을 힐끗힐끗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국어를 영어로 변환할 때 생기는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사실 변환 과정 중에서 생기는 부분이라기보다 한국어 담화의 신기한 점인 것 같기도 하다. 바로 'OO 엄마'.


[힘쎈여자 도봉순] 1화 / 넷플릭스 캡처

한국어 대사로는 '봉기 엄마', '국두 엄마'라고 불리는 인물들의 이름이 영어 자막으로는 각각 '황 여사(Ms. Hwang)', '정 여사(Ms. Jung)'로 번역되었다. 영어 자막을 힐끗힐끗 보면서 봉기/봉순의 엄마와 국두 엄마가 각각 황 씨, 정 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화에서 봉기/봉순 엄마의 "참 '우리' 국두가 며칠 전에 경찰서에서 봉순이를 봤다네요?"라는 대사로 정 여사가 국두의 어머니라는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어 대사로는 정 여사가 국두의 어머니라고 느끼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한국어 '우리'의 마법이다. '우리'를 붙임으로써 국두가 그녀의 아들임을 함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힘쎈여자 도봉순] 2화 대사: "저기요 국두 엄마" / 넷플릭스 캡처

2화에서는 황 여사가 정 여사를 "저기요, 국두 엄마"라며 부른다. 이 대사를 통해 정 여사가 국두 엄마라는 것을 200%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로는 Ms. Jung으로 번역되었다. 극 초반 남자친구는 '정 여사'의 정체와 역할에 대해 궁금해했다. '정 여사'는 극 중에서 봉기/봉순의 아빠와 모종의 케미를 자랑하며 봉기/봉순 엄마(황 여사)의 질투심과 분노를 자극하는 인물이다. 단순히 봉기 봉순의 아빠와의 케미를 자랑하기 위해 설정된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두 사람 간의 관계가 조금 밋밋하다. 여기에 끝도 없다는 자식 자랑까지 합세해 봉기/봉순 엄마에게 눈엣가시 같은 캐릭터로 완성된다. 이는 '국두 엄마', '봉기/봉순 엄마'라는 문화적 담론을 이해해야 더 재밌게 느껴지는 상황인 것이다.


나중에서야 느낀 것이지만 극 중에서 이들은 단 한 번도 그녀들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그러나 드라마 홈페이지 인물 소개에는 그녀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황 여사는 극 중 봉순이와의 교류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막과 소리 없이 보아도 누구나 봉순의 엄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봉기 봉순의 집에서의 장면신도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여기서 신기한 건 황 여사와 국두가 조우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타나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황 여사는 우리에게 '국두 엄마'다. 그녀의 성이 정 씨라는 것을 아는 한국 시청자들은 많이 없을 수도 있다. 시청자에게 중요한 건 그녀는 국두 엄마라는 것.


드라마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에서도 어머님들은 이름보다는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요즘 어머님들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렸을 적 어머님들은 다들 OO엄마라고 불렸다. 우리 엄마는 항상 찬희 엄마였다. 우리 할머니도 우리 엄마를 찬희 엄마라고 부르시고, 동네 아주머니들도 우리 엄마를 찬희 엄마 혹은 동생들의 엄마로 부르셨다.


나와 함께 자란 친구들의 어머님들은 우리 엄마를 여전히 찬희 엄마라고 부르신다. 그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사실 서로 통성명을 할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의 어머니였으니까. 몇십 년이 흐른 지금 서로의 이름을 묻기에는 어색할 수도 있겠다. 


다행히도 우리 엄마는 지난 20년 간 잃어버렸던 이름을 찾으셨다. 최근 엄마를 알게 되신 분들은 이제 엄마를 미영 씨라고 부르신다. 우리 엄마가 이제는 이름을 되찾은 것 같아 기쁘다. 긴 시간 찬희 엄마로 살아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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