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작업일지_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의사소통, 정확히는 '말을 하는 것'을 하지 않고 지낸적이 있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10년전 대학시절 수업 중에 '자화상을 그리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기'라는 과제를 한 것이었다.
처음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기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과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정 반대의 일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곧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만 지금의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으로 생활할지, 어떤 일상을 보낼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그려내는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다른 사람으로 산다는 것.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된다는 것부터 어떤 방법으로 일상의 변화를 주어야 할지 꾀나 고민되는 주제였다. 단순히 겉모습의 변화로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나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다른 사람처럼 연기를 한다는 것으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나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했을 때, 내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는 말 혹은 나의 언어들이 나를 가장 직접적으로 많이 보여주지 않았나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보는 것으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써 한 달을 보내게 되었다.
우선 작업노트를 하나 준비하고 매일매일 내가 느끼는 것들은 자기 전 일기처럼 기록해 두기로 했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기에 교수님은 이 수업을 함께 듣고 있어서 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제외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과제 때문에 그렇다는 이해를 구하지 않고 바로 직접 부딪쳐 보는 것이 좋을 거 같다고 하셨고, 단순히 말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사표현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하셨다. 예를 들면 고갯짓이나 손짓처럼 말을 대신해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시작하기 전에 작업노트에 말을 하지 않고 지냈을 때 어떤 생각이나 상황이 올지, 과연 말을 하지 않는 행위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지 등, 예상하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일단 생각할 시간이 많을 것 같았다. 말을 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고립의 상황이지 않을까. 묵언수행과도 같은 한 달 동안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없다면, 결국 내 속에서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고 생각하는 시간들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상당히 불편할 거라는 예상도 적어보았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에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할 것 같았다. 그렇게 수많은 예상들을 적어보고 다음날 드디어 의사소통이 없는 한 달이 시작되었다.
가장 첫 관문이자 큰 문제는 가족이었다. 하루아침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 딸은 부모님에게 특히나 집안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엄마에게는 큰 문제였다. 초반에는 기분이 그냥 좋지 않은가 보다로 넘어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엄마는 답답함과 이해할 수 없는 침묵에 대해 화를 내기 시작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멀쩡하던 딸이 하루아침에 며칠 동안 뭘 물어봐도 답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나. 그렇게 며칠을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며 화를 내시던 엄마는 이내 두 손 두발을 다 들고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의사표현이 없는 딸을 받아들이셨다. 여기서부터 첫 번째 나의 예상이 빗나갔다. 답답할 것 같다는 예상은 순전히 나 스스로가 답답할 것 같다는 예상이었는데 상대가 답답할 것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 나를 향한 화로 표현될 거라는 것도. 비슷하게 학교 동기 중에 한 명은 내가 인사에도 답이 없고 묻는 것에도 대답이 없어서 자신에게 화나거나 기분이 상한 것이 있어서 그런 줄 알았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해주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정작 말을 하지 않는 나는 답답함이 크게 없었다. 평소에 말을 아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냥 내 앞에 벌이지는 상황들을 '관찰'하기만 하면 되는 일상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텔레비전을 통해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처럼 평소에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보이기도 했고, 말을 하지 않는 나를 대하는 상대의 태도나 말들로 오히려 평소의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 말을 통한 의사표현이 없는데, 오히려 상대의 반응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그리고 가까운 사이의 지인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내가 했을법한 선택들을 대신해서 해주고 챙겨주고 있었다. 그 선택들을 꾀나 정확했고, 그간 내 취향들이 확고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었다.
보름 정도 지났을 무렵, 그때 당시에 글을 쓰고 교류하던 블로그에도 어떠한 글도 쓰지 않고, 댓글 또한 쓰지 않자 블로그를 통해 연락을 하던, 물리적 거리로 가깝지 않은 지인들의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물론 전화통화 또한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전화를 아예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화는 받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전화기의 고장을 의심했고,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해서 꾀나 진지하게 걱정하는 연락들이 왔었다. 그러던 중 같이 수업을 들어서 사정을 알고 있던 친구가 블로그 방명록에 글을 하나 남겨주었다. 현재 과제의 일환으로 의사소통의 부재 속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기 를 하고 있다고, 그렇게 안부가 전해지고 나니 걱정의 전화들은 사라졌고, 블로그에 들러 댓글을 달아주곤 했던 엄마도 아시게 되어 갑작스러운 침묵에 대한 오해(?)도 무사히 풀리게 되었다. 블로그에 새 글이나 댓글이 달리 않는다는 것 때문에 연락이 오기도 하다니 생각보다 내 일상에서 지인들과의 의사소통에서 온라인의 비중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와 통화를 하는 지인도 있었다. 평소에도 이런저런 생각을 나누고, 지금까지도 생각을 함께 꺼내놓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하며 작업을 하는 나에 대해 무한한 지지를 보내주는 지인이었기에 말이 없던 나에 대해서도 크게 위화감 없이 말을 걸고 전화를 주어 거의 독백에 가까운 통화를 했다.
그렇게 보낸 한 달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나를 지우고 지낸 한 달 동안 스스로 생각을 통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그 시간 동안 만난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 내가 그간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 내가 생각하는 나와는 전혀 다르게 나에 대해 생각했다고 해도 그런 부분 또한 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라는 사람이 오로지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상대방에 의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에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이상 일상의 대부분을 누군가와 만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상대를 통해 보이는, 상대가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도 내 일부분이기 때문에 타인들이 생각한 '나'와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가 함께 있어야 비로소 완전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생각들도 정리가 되었으니 작업으로써 한 달의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 자화상을 최종적으로 그려내야 했다. 서양화 수업이라 자화상을 그려야 했지만 전공은 조소였기 때문에 교수님이 자소상을 만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셔서 자소상으로 만들었다.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한 달의 시간을 통해 느꼈던 '나'를 과연 입체작업으로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우선 타인을 통해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에 착안하여 반사되는 물체를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바깥의 풍경을 고스란히 반사해서 보여주는 쇠구슬을 주 재료로 선정하게 되었고, 1대 1이기도 하지만 다수와의 관계이기도 한 상대적인 관계의 표현을 위해 여러 개의 쇠구슬로 제작하기로 하고 다수의 구슬로 최종적으로 만들어낼 형태나 결합의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구슬이 모여 나를 만들어야 하고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상대로 의해 혹은 자신의 의지로 모습이나 형태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나'라는 사람이 가진 변화의 가능성 또한 자소상에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용접이나 접착하는 방식이 아닌 커다란 자석에 무작위로 쇠구슬을 붙여 정해져 있지 않은 가변 상태의 자소상을 만들었다.
자소상 앞에 서서 자소상을 바라보면 크기가 제각각인 구술에 비친 여러 각도의 나의 모습들을 볼 수 있고, 그 자소상은 작가뿐만 아니라 관람하는 관객들도 다양한 각도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정면의 모습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옆모습으로 보인 다고 해도 그 모든 각도의 모습들이 전부 '나'를 보여주고, 그 모습들이 만들어낸 '나'라는 덩어리는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으며 '나'를 이루어내주고 있는 타인들도 영원하지 않고 때에 때라 새로운 구슬을 만나기도 떨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변화가 일어나는 중에도 구슬 속 자석, 나 스스로의 '나'는 언제나 타인이 보여주는 '나'와 함께 중심을 잡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