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에는 같은 회사 직원분과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짧은 산책을 하다가 조카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중에 나는 유산을 조카에게 물려주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갑자기 칠순 넘어서도 결혼을 하고 아이는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무척 놀랐다. 평소에 내가 아내 이야기를 많이 하기도 했고, 내 결혼식에도 오셨던 분인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그럼 제 아내는요?' 하고 물었더니, '아, 맞다. 나는 왜 네가 결혼을 안 했다고 생각했지?' 하시는 것 아닌가. 정확한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도 그저 해프닝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찜찜한 마음은 가실 길이 없다. 회사에다가는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티도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정말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까.
지난 여름에는 성당의 신부님께서 갑자기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통화를 하고 싶다고. 그때도 신부님과 통화하기 전까지 무척 떨었던 기억이 난다. '무슨 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이 확률적으로는 99%에 달한다고 생각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었다. '혹시 신부님께서 어딘가에서 내 이야기를 들으신 건 아니실까?' 나는 가톨릭교계의 높은 분들을 꽤나 알고 있고, 그분들 중 상당수는 내가 결혼하신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성당에 다니면서 그런 높은 분들을 알고 있다는 내색은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 아닌가. 신부님과 통화를 하기까지 '형제님, 왜 숨기셨어요. 왜 거짓말하셨어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까 봐 마음 한켠에 불안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몇 시간 뒤 신부님과 통화했더니, 역시 내 과학적인(?) 예측 그대로 신부님은 여름캠프를 같이 가자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내내 찜찜한 마음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결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죄 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물론 아내와 헤어진 것이 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숨기고 있으니 거기에서 오는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브런치에도 적었지만 몇 번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도 있다. 이제는 제법 그런 상황에서도 능숙하게 대처하고 있긴 하지만. 목요일에는 6~7년을 알고 지내온 동아리 선배 누나를 만났는데, 그간 그래도 몇 번을 만났지만 누나는 내가 결혼했는지는 모르고 계셨다. 이번에 처음으로 결혼했는지 물어보셨는데, 실은 나는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그 누나의 친구분들은 내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지난달의 등산모임은 내가 모임을 주최했지만, 조카를 돌보느라 결국 나는 가지 못했고 뒤풀이에만 참석했는데, 한 선배가 물어보았다. '아내는?' 등산모임에는 아내와 헤어진 사실을 아는 선배도 계셔서 이야기가 나왔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별 말이 없었나 보다. 순간 나는 당황했지만, '시조카 보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고 웃으며 능청스럽게 넘어가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선배도 쉽게 수긍하는 듯했다.
지인을 분류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내게는 지금 지인을 분류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생겼다. 아마도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이라면 내가 아내와 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비교적 나와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회사에는 한 명도 없지만, 이리저리 더해 보면 수십 명은 되는 것 같다. 다행히 그 사람들이 있어서 나의 숨통도 트여지고, 솔직한 내 마음과 상황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부류로는 우리 회사 사람들을 포함해서, 아직 내가 결혼한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주 월요일에 만난 형도 만나서 안부를 묻다 보니, '부인께서는 잘 계시고?' 이렇게 묻는데, 그 형과 내가 사이가 멀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또 그렇게 마음을 쉽게 터놓을 만큼 가깝게 지내진 못했던 것 같아, 그리고 구차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지도 않기도 해서, '네,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대개 나는 아내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아내는 무척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한다. '아내'라는 단어는 거짓말이지만, 나와 헤어지고 '아주 잘 지낸다'는 것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성당 사람들처럼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이제는 그냥 새로 알게 되는 사람들에게는 결혼에 대해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다. 나도 참 능청스럽다고 생각한다. 만약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와서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도 한다. 아마 자기합리화이겠지.
링컨이 한 말이었는지 누가 한 말이었는지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사람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순간은 속일 수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고, 영원히 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했다. 내가 악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언제까지 이런 거짓 속에 살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지금 세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셈이고, 그래서 항상 조금은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은 실수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고. 다행히 엄청나게 큰 실수까지는 없었지만.
얼마전 동생의 부탁으로 내가 조카의 어린이집 하원을 맡으러 간 적이 있었다. 예전에 처조카의 어린이집 하원을 간 적도 꽤 있어서 힘든 상황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큰아빠'를 알아 보고 달려오는 조카를 보면서 행복하기도 했는데, 동생에게 들으니 다음 날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내 결혼 여부를 물어보셨다고 한다. 작년에도 일하면서 만났던 분과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자기가 아는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다며. 순간 당황한 동생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결국 당황하여 '아, 형은 결혼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고백했다. 내가 곤란한 것이야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졸지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내가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회사 사람들을 제외한 내 지인들의 경우라면 아마도 언젠가는 조금씩조금씩 소문이 돌아 결국에는 아내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내 생각보다는 내 주위 사람들의 입이 무거운지 무척 천천히 그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굳이 이 엄청난 사실을 처음부터 고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긴 하지만한편으로는 내가 솔직하지 못하고 그래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가끔씩 사람들의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에서도 '혹시 이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하는데, 그건 그만큼 내가 마음이 불편하단 것이고, 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겠지.
솔직하고, 정직하게 사는 게 가장 좋다. 안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역시 평범한 사람은 죄 짓고는 못 사는 법이다. 늘 도둑이 제 발 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