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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가희 Aug 31. 2022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회복지사의 서재 독서 기록

나는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자기를 소개하고, 삶을 드러내는 건 무척이나 용기가 필요한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을 놓곤 슬퍼하면서도 위로받는 위선적인 면모는 인간 본성이 아닐까.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받는 과정을 겪어내고야 결핍에서 해방되는 큰 걸음이라 느낀다. 아픔을 꺼내  마주하는 게 괴로워서 외면하거나 알지 않고자 하는 건 잠시 묻어 두는 거라 애써 감출 뿐 소멸은 아니다. 동정의 대상이 되고자 간절한 사람이 없듯이 누구도 알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다. 때문에 자기 삶을 타인에게 노출하는 사람에겐 특별한 위엄이 있음에 공감했다.


잘못이나 손해가 되는 입장에 서 봤는지, 혹은 잘못이나 손해가 되는 입장에 놓인 자를 위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분명 누구의 삶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이분법으로 잘못을 규정하는 잘못된 사회와 맥락을 바로잡기 위해 해온 실천을 돌아봐야 했다.


결핍과 열등감 속에서 최소한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약자를 낮춘다. 정상에 오르는 길보다 약자를 밟고 서는 과정이 더 쉽기 때문에.


장애인 이동권 시위 이슈가 꽤 오랜 시간 오르내리면서 장애인 인권에 관한 도서를 내리읽었다. 사회복지를 업으로 하고 사람으로서 가치나 태도가 보다 넓고, 진보적이라고 자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이겨내다.', '극복했다.'라는 표현을 써 왔다. 마치 그것이 장애를 능동적으로 보고, 편견을 갖지 않는 자세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올해 들어 장애란 '극복'이 아닌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사회에서 살기 위한 '적응'에 가깝다고 인식했다.


지역아동센터의 낙인(수급 가정, 한부모 가정, 장애 아동이거나 소위 문제아라고 부르는 아동이 다니는 곳이라는 편견)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모든 센터 사회복지사가 한마음 한뜻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원을 받기 위해서 어린이의 슬픔과 불행을 팔아야 했다. 불쌍해 보일수록 도움의 손길이 늘어서일까.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지낼 수 있는, 어린이의 권익을 위해 힘쓰는 지역아동센터에 후원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였고, 인간 심리를 바탕으로 전략적 접근을 해야 하는 게 후원이었나보다.


태어나서부터 경쟁인 사회에 살면서 각박해짐을 느낀다. 공생과 연대를 위해 필요한 건 내가 잘 살기 위한 교과 성적이 아니라 같이 적당히 살기 위한 반응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현대 사회에 서툰 이를 품어주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실속 못차리는 사람으로 비춰진다는 게 안타깝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시위를 옹호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그저 감성적인 접근 방식으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걸'보다도 일주, 한 달의 불편함과 부당함이 그들은 매일이었을 거란 생각이, 자극적인 시위 방식이 장애인 혐오로 확장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도했을 거란 생각에.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비장애인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고 역정 내기보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이동권 보장에 대해 논의하라고 해야 했다고. 같이 살기 위해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장애인이 아니라고 여겼다.


결혼에 대한 사회 관념이 달라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달라질지 모르지만 다양한 가족 구조가 있다는 걸 인식할 정도는 됐다고 판단한다. 출산 연령이 높아지고, 호르몬 영향 등으로 인해 유산 또는 장애아 출산에 대한 걱정으로 각종 검사를 진행한다. 자녀 계획에 있어 적극적이진 않았는데 여성 나이 서른이 넘어가면 여러모로 힘들 테니 아이를 갖고자 하면 최대한 빨리 준비하라는 친구 말에 산전 검사는 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언급이 자주 될수록 임신부는 스트레스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산전 검사를 해서 알고자 했던 건 부부의 건강 상태, 장애아 출산 여부를 확인하여 예방하고자 함이었다.

한편으로 모순될지 모르지만, 사회복지 현장에서 장애아동을 돌봤다. 장애아의 부모 역할과 책임이 비장애아 부모보다 크다는 것도, 느끼는 죄책감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도, 사회에서 적절한 서비스를 받기 어렵다는 것도. 양육자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사실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서 행복한 아이로 자라게 할 자신이.


그런 입장이다 보니 청각장애인 정자를 기증 받아 출산한 부부의 행보에 굉장히 놀랐다. 자녀가 살아갈 세상을 위한 선택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모와 지능을 따지는 게 인간 본성이라면 그들의 선택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장애는 '일반적'이지 못하고, '정상'이 아니라고 구분지은 것밖에 안 됐다. 진짜 문제는 뭘까.


사회 인식이 어휘를 변화시킨다. 때론 어휘의 변화가 사회 인식을 바꾸고. 그렇기에 말에는 무게가 있다.


사례에 나온 부부의 마음에 무척 공감했다. 그들은 장애인이면서 장애인 권리 향상에 힘쓰던 사람이다. 나는 대상자의 권리 향상을 위해 힘쓰고, 힘써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욱 자기모순에 실망하고, 나아가선 죄책감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문제 알기, 관심 두기, 공유하기, 생각하기는 수용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옹호하기, 시위하기, 후원하기와 같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아니어도 연대할 수 있다. 나에게 연대는 언제나 같이 살기 위함이다.


지역사회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때 강제 입원 말곤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정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사회복지사라는 이유로 정신질환 환자를 강제 입원시킨다는 게 말이 되는 건지. 인권 문제는 아닌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한 가정에 정신질환 환자를 더 늘릴 순 없었다. 어떻게든 멈추게 해야 했다.


유도블록이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제거하거나 색상 교체를 논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각이 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경우 노란색만큼은 볼 수 있다고 한다. 눈이 안 보이는 게 불편해서 안경을 맞추고, 라식 수술을 하면서 정작 어떤 방법으로도 시력을 찾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에겐 조금의 희망도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몹시 불편했다.

일상을 살아 내느라 바빠서,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서 놓치는 거다.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 있고, 신호등이 없는 곳이 있다. 누구나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권리교육이 의무화됐고, 인권은 일상의 이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진 자가 더 많이 누리고, 다수에게 반응한다.


장애인용 리프트가 있는데 이동권 시위를 하는 이유가 뭔지 묻고, 시민의 출퇴근 이동권은 보장해주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지하철에 설치된 리프트를 이용하다 사망하는 일이 종종 있으니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는 건 어떤 의미론 목숨을 거는 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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