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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나무 Feb 23. 2023

열정의 빈자리

모든 것이 소진 됐다고 느낄 때

 몇 달간 글을 쓰지 못했다. 보통 좋은 마음이 올라올 때, 타인에 대해 다정한 마음이 들고-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스스로가 좋을 때 글을 쓰고 싶어지는 데, 그렇다면 쓰지 못했던 긴 시간 동안- 마음 안에 자랑할 만한 무엇보다는 숨기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열등감이나 자포자기의 마음, 다정에 위배되는 그 모든 부끄러운 마음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럼에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노트북을 켰고, 잠시간 하얀 화면을 바라보고는 다시 노트북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사한 새로운 동네는 내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했다.


 이사 한 집은 이미 고착된 내 생활 반경과 너무 멀었다. 그곳의 교통편 또한 익숙지 않으니, 버스를 잘못 타 빙빙 돌아가거나, 배차 간격이 너무 길어 정류장에서 한참을 벌벌 떨며 기다리기도 했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버리고 있다는 광분이 차곡차곡 쌓여 많은 날을, 그 분을 차마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대며 대문을 열어젖혔다. 집 안에 들어섰을 때 부모님이나 동생이 보게 될 내 표정이 싫었다. 그래서 한 동안 대문을 열기 전, 이런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이 난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아득함에 숨이 가빴다.


 또한 산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걸을 곳이 마땅치 않다는 생경한 괴로움을 안겨주는 동네였다. 사방이 큰 도로로 둘러 쌓여 있고, 그나마 걸을 수 있는 거리는 그 끝이 어둑한 산으로 막혀 있어서 그 근처만 가도 인적이 드물어졌다. 걷고 싶어서 버스를 타고 (걸어가기엔 위험한) 큰 도로를 넘어 다른 동네를 가기도 하고, 좋아하는 산책로가 있는 예전 동네로 가서 한참을 걷다가 오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사 초의 시도들이었고, 여러 달이 지나자 생활의 피곤함에 자연스레 포기하게 됐다.


 거실에 서 있다가, 침대에 누워서- 문득 문득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넓어지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새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내가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집은, 단순히 예전 집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달라진 많은 풍경들이 미웠다. 세월 속에 사라져 가는 것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것이 새로워진 이 공간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낯선 동네로 이사한 이 상황처럼 연기에 대한 낯선 열정의 부재를 느꼈다.


 그 열정의 처음을 짚어본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작했다고 해서, 모든 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하루하루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튀는 난생처음 느끼는 흥분의 연속이었다. 내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게 거의 전무한 지루한 삶에서, 열심히 하면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생겨 났다는 해방감. 노력한 만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성취감. 처음으로 쥐어 본 자유의 느낌이었다. 꿈이 명확한 사람 다운 호기로운 시절에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잘 알고 있고, 많은 걸 갖고 있고, 누가 뭐라고 하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그러나 그 많았던 확신들이 전복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다시 쥐어야 할지, 내가 다시 가질 수 있는 열정은 어떤 모양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울렁거리는 마음 속에서 내가 단순히 지친 것인지, 용기를 잃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꿈을 잃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소진해 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미 오래 전 소진됐지만 알아채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동안 나를 너무 몰아세웠기 때문에, 흥미를 잃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 아니었을까? 왜 그 열정이 무한할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들이 불쑥불쑥 올라올 때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집을 잃은 사람처럼 멈춰 서 있었다.


 그런 의문을 가진 지 몇 달이 지나고, 글을 쓰고 싶을 때 나는 노트북을 켜는 대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책이 내 삶에 늘 그래왔던 것처럼 생각이 흐를 수 있게 도와줬다. 어쩌면 (나의 10대, 20대, 30대가 다르듯) 꿈의 내용은 계속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예전의 열정이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는 뜨거움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익숙한 교만의 빈자리가 주는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은 내가 옳다고 우기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를 무시했던 많은 사람들과,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이제 그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하는 시간이 온 것 아닐까. 허기를 채우기 위한 삶보다는, 허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어른이 되기 위해.


 새로운 동네에 걸을 공간이 마땅치 않다 보니, 다른 동네에서 예상치 않게 만나게 되는, 걷고 싶어지는 거리는 더 큰 기쁨이 되었다. 그리고, 연기에 대한 묵은 열정이 사라지니 새로운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연기의 원초적 재미. 진심으로 스스로가, 타인들이 궁금해지는 마음.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계속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 발견할 수 있다는 자유와, 사람이 사람을 궁금해할 때, 타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가만 듣게 될 때의 조용한 성장.


 어둑한 새 동네를 걷는다. 나는 이 동네가 좋아질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지금의 마음일지 알 수 없다. 이제는 그 모든 것에 확신을 갖지 않고 걸어본다.

  작년에는 많을 글을 올리지 못했다. 올해는 더 자주 쓸 수 있기를. 비록 부끄러워서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커버 이미지 : Gianni Berengo Gardin. Asciano, Siena.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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